1. 들어가며
한라산은 제주 섬의 한복판에 있다. 그 자락은 오름과 오름으로 이어지며 중산간을 지나 해안에 이른다. 3백60여개의 오름이 점과 점으로 제주섬을 둘러싸고 있다면 계곡과 하천은 선과 선으로 산의 지맥을 동서남북으로 흩뿌려 놓는다. 도내에 산재한 60여개의 크고 작은 하천 줄기는 때로 용출하거나 복류(伏流)하면서 뭇 생명체를 거느리며 번성케 한다.
한라산은 예부터 삼신산의 하나로 일컬어졌던 한라산은 겨레의 영산으로서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은 물론 지금도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는 1950m의 남한 최고봉이면서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는 상징성으로 인해 백두산과 함께 조국통일을 이야기하는 화두가 되기도 한다. 최근 남북관계가 해빙의 무드를 타고 왕래가 잦아지면서 한라산의 기슭인 제주도에서 남북평화와 협력을 논의하는 각종 회담이 열리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제주도민들의 삶의 터전이자 자원의 보고인 한라산에 관한 도민들의 인식은 작금에 이르러 더욱 각별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오래 전부터 한라산을 생태자원의 보고라고 말하여 왔다. 각종 조류와 곤충, 식물은 다양한 모습으로 산의 내면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식물중 절반이 넘는 1천8백여 종의 각종 희귀한 식물과 4천여종에 이르는 곤충 등이 제주라는 좁은 공간에 자생하고 있음은 이를 반증한다. 21세기를 맞아 종(種)다양성의 확보와 자원화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라산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고, 이를 정리한 자료는 또한 어느 정도 풍부한가. 과연 제주를 상징하는 산으로서만 아니라 남한 최고봉이자, 백두와 더불어 민족의 상징이 되고 있는 한라산에 걸맞게 연구는 이루어져 왔고, 자료 또한 풍부한 것인가.
부끄럽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난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라산에 관한 학문적 관심과 연구는 한 두 개 분야를 제외한다면 거의 불모지에 가까웠던 것이 사실이다. 우선 전문연구자들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사회적 관심도 극히 희박했다.
한라산에 관한 학자들과 일반인들의 관심을 촉발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한라일보사가 대하기획으로 추진하고 있는ꡐ한라산학술대탐사ꡑ였다. `한라산학술대탐사ꡑ는 당초 1996년부터 구상되었는데 탐사에 나설 관련 전문가를 확보하지 못해 2년여간 유예되었다. 그야말로 분야별 전문가들이 단수(單數)에 그쳤던 사회였다.
탐사단 구성과 함께 1998년12월 12일부터 `제1부/하천과 계곡‘ 탐사에 나선 탐사단은 1999년 1월1일자에 탐사계획을 발표하였다. 탐사는 전체 기간을 20년으로 잡고, 한라산의 하천과 계곡, 한라산의 오름, 한라산의 식물, 한라산의 동물, 한라산의 습지, 한라산의 민속, 한라산의 역사유적, 한라산의 문화현장, 한라산의 경관 등 8부작으로 구분해 연차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1998년 12월부터 2003년 5월까지 추진된 `제1부/제주의 하천과 계곡‘ 탐사는 한라산의 해발 1,000m 이상에서 발원하는 20개 대형 하천 중 16개 하천을 탐사, 한라일보 지면을 통해 160여 회 연재 보도됐다. 또한 `제주최장의 하천 천미천‘ `산을 벌른내 효돈천’, `산북 최대의 하천, 한천‘ 등 3권의 책으로 발간됐다. 이는 당시 제주의 하천에 관한 보고서가 200쪽 남짓한 `제주시 3대 하천/ 산지천, 병문천, 한천’이 유일했다는 점에서 단일 하천을 대상으로 한 보고서가 3권 발간됐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2. 제1부/ 생명의 근원, 하천과 계곡
제주의 하천은 경사가 급한 남북에 발달한 데 비해 경사가 낮은 동서쪽에는 상대적으로 매우 빈약한 편이다. 제주시와 서귀포시에 웅장하고 경관이 수려한 급경사의 하천의 밀도가 높은 반면에, 한림과 한경 등 북제주군 서부지역과 북제주군 동부지역인 조천, 구좌, 남제주군 성산지역은 하천발달이 저조하다.
도내에는 연중, 전 구간 물이 흐르는 하천이 거의 없다. 상류에서 유출하다가도 땅속으로 잠수해 버리거나 상류에서는 건천인데 해안부근에서 다시 솟아올라 흐르는 것이 보통이다. 제주민들은 하천에 많은 문화와 역사유적을 남겼고 식수를 해결했다. 그래서 제주 선인들의 체취가 진하게 묻어난다.
제주의 하천은 근래 훼손이 심해지고 있다. 하천정비라는 목적으로 하천의 원형이 사라지고 과도한 지하수 개발로 수자원이 고갈되고 있다. 하천 정비는 집중 호우 때 범람하자 하천 바닥을 긁어내고 일자형으로 굴곡을 펴는 형태로 추진돼 왔다. 일부 하천은 아예 콘크리트로 덮여버리기도 했다. 상가 건물로 복개됐던 산지천을 복원하면서 제주도민들은 뼈저린 반성을 해야 했다.
제주의 하천에 대한 기록은 1936년 일제가 전국 하천의 길이와 명칭을 정한 `조선하천령'에 의해 공식적으로 정리됐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토대로 1982년에 제주도지사가 준용하천을 고시한데 이어 지금은 지방2급 하천으로 분류돼 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제주의 하천 명칭은 1936년 일제 당시 `조선하천령'에 의한 것이다.
이 글은 한라일보 한라산생태학술탐사팀이 1998년 12월부터 2003년까지 약 5년간에 걸친 탐사를 바탕으로 기록한 것이다. 탐사에는 취재진과 지질, 동․식물, 인문지리, 민요․설화, 수자원, 역사 분야 전문가들이 다양하게 참여했다.
탐사는 한라산체에서 발원하는 하천 중에서도 지역을 대표할만한 곳을 중심으로 모두 16개 하천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탐사는 본류를 중심으로 하구에서 발원지까지 전 구간 도보로 이루어졌다.
▶광령천(무수천)
광령천은 제주시와 북제주군 경계지역을 가로지른다. 광령천을 제주시 지역 하천에 포함시킨 것은 하천의 종점이 제주시 외도동이기 때문이다. 광령천은 여러가지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머리가 없는 내라 해서 무수천(無수川), 물이 없는 건천이라는 뜻의 無水川, 지류가 수없이 많아 無數川이라 불리워지기도 했다. 이 계곡에 들어서면 근심이 사라진다는 의미로 無愁川으로, 또 외도와 도평 인근 주민들은 무수천을 외도천이라 부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하천을 곧잘 무수천으로 기억한다.
이 하천은 행정적으로는 지난 1936년 1월 이후 광령천으로 지정 고시돼 있다. 광역단체의 관리대상 하천인 지방 2급 하천 60곳 중 하나이다.
광령천은 국립공원 외곽 지역만을 고려한 것이어서 하천 전체를 대변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제주도가 고시한 기준으로 보면 광령천의 기점은 북제주군 애월읍 광령리이며 종점은 제주시 외도동이다. 이 기준으로 할때 하천연장은 18.3㎞이다.
그러나 국립공원구역가지 포함시킬 때 광령천의 연장은 발원지에서 하류까지 통상 25㎞ 내외로 기록되고 있다. 이 역시 광령천 본류의 거리만을 나타낸 것으로 실제 광령천 전체 길이로 단정짓는 데는 한계가 있다. 본류 이외에 광령천으로 통하는 크고 작은 수십개의 지류들까지 합치면 무수천의 길이는 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천(大川)이기 때문이다.
광령천은 Y계곡을 발원지로 하천의 모습을 띄기 시작한다. 이 가운데 Y계곡 발원지는 한라산 정상 서북벽과 장구목 일대로, 실질적으로는 한라산 정상에서 시작된다 해도 무리가 없다.
이보다 조금 하류인 불레오름 서북쪽과 영실 북쪽, 만수동산(만세동산), 사재비오름, 망체오름 일대에서 발원하는 크고 작은 지류들까지 합류한다.
만수동산에서 이어진 한라계곡은 어리목 하류, 1100도로 한밝교 하류에서 본류인 Y계곡과 합류하고 또다른 소지류들은 해발 700m 부근 천아오름 수원지 부근에서 합류, 대천을 이루며 하구로 향한다.
대천을 이룬 광령천은 갖가지 비경을 뽐내며 `진달래소'와 광령 8경을 지나 외도다리 바로 위에서 도근천까지 아우른다.
광령천은 대부분의 구간이 건천이면서도 물이 흐르는 구간이 비교적 긴 하천으로 유명하다. 도내 하천이 연중 유량이 없고 강우기 이외에는 건천인 점을 감안할 때 광령천은 도민들에게 귀중한 수자원을 제공하고 있다.
광령천 상류 두 갈래의 Y계곡은 양쪽 모두 연중 용출해 어승생수원지에 저장돼 도민들의 젖줄이 되고 있다.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 용출지점은 탐사결과 `촛대바위' 맞은편의 계곡 능선 상류 해발 1,500m 지경에서 확인된다. 이 샘물은 어승생수원지 취수보로 통한다.
하류로 이어지면서 `치도'를 거쳐 진달래소, 고냉이소, 진소, 외도수원지 직전의 검은소 등은 물이 고여있는 정수지대를 이루며 곳곳에서 용출한다. 다시 외도수원지에 이르러서는 지표면 위로 현류하면서 월대, 외도다리로 이어진다.
진달래소는 그 웅장함이 극치를 보여준다. 콤파스로 돌려놓은 듯 대형 원 모양을 띄고 있는 진달래소는 지름이 약 70m에 이르고 좌우 직벽의 높이도 50m가 넘는다. 깎아지른 듯한 직벽은 절묘한 주상절리를 이루고 있으며 소(沼) 전체가 마치 천정없는 대형 체육관을 연상케 한다.
제주시와 북군 경계지역을 흐르고 있는 광령천은 국립공원관리구역과 그 이외의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Y계곡과 한라계곡은 모두 한라산국립공원 구역에 포함돼 있으며 국립공원 관리구역은 해발 700m 지경까지 이어진다.
서북류하던 광령천은 이후 제주시 해안동과 북군 애월읍 광령리를 경계로 광령교에 이르고, 동․서 사라마을 중간지점을 거쳐 도평, 외도동 `참오랭이', 월대로 이어진다.
이들 마을들은 광령천과 그 지류인 하천에 흐르는 물을 찾아 터전을 정한 설촌의 역사를 갖고 있다. 특히 광령마을은 선사시대부터 주민들이 살아 온 제주의 가장 오랜 마을 중 한 곳으로 손꼽힌다. 이 지역에는 고인돌 수십기가 집단으로 분포돼 있어 이같은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광령천과 더불어 삶을 살아 온 마을 주민들은 `광령8경'과 월대 등에서 풍류를 즐기는 등 하천과 밀접한 생활을 해 온 것으로 보인다. 하류에는 조공포, 수정사지와 같은 유적도 남아 있다.
▶병문천
병문천(屛門川)은 하천 양쪽 절벽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병문천 하구에 해당하는 현재 병문하수펌프장 서쪽 일대는 지금처럼 복개되기 전만 해도 병품을 연상할 정도로 비교적 깊은 계곡을 이루었다.
조선 말엽 조련군의 집합장소였다는 데서 `병문내'라는 것이 차차 와전돼 `뱅문내'라 호칭했었다고도 한다.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는 ꡒ병문천은 제주읍 오등리에서 발원하여 제주읍 삼도리를 경유해 입해(入海)하고 밀물 때는 물이 나오다가 썰물 때면 마른다ꡓ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도는 지난 82년 도내 준용하천(도 관리대상 하천, 현재 지방2급 하천)을 지정, 고시하면서 병문천의 길이를 12㎞로 정리했다. 그러나 이 길이는 해발1,530m 지경의 병문천 발원지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다. 국립공원 외곽지역 오라동(335번) 일대에서부터 하구 용담동까지만 가리키는 것으로 실제 병문천 길이와는 차이가 있다.
병문천은 해발 1,530m, 1,500m, 1,460m 지경 세 갈래에서 시작된다. 발원지 동남쪽 지경에 천미천을 발원시킨 `흙붉은오름'을 마주하고 있다. 병문천을 잉태한 세갈래 계곡은 해발 1,000m 부근에서 하나의 줄기로 합류해 본류를 이룬다.
해발 800m 일대에 발달된 구린굴을 통해 하천의 형성원인을 추적해 볼 수 있다. 하천 한복판 구린굴 입구는 천정이 무너져 내린 함몰지구가 완연하다. 지금도 누수에 의한 침식과 균열 현상으로 하천화가 진행되고 있다. 구린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하류에서도 함몰지대로 추정되는 깊은 웅덩이가 10여곳 확인된다. 병문천이 하천화 되기 이전에는 천정이 있는 동굴지대라는 학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물이다.
병문천은 관음사 야영장과 오등동을 지나 삼도동, 용담동 복개구간으로 이어진다.
병문천 복개는 탑동 공유수면 매립사업에 따른 개발이익을 환수하기 위한 사업으로 태동했다. 1986년말 탑동 매립 면허가 발부된 이후 계속돼온 면허에 대한 불법성 논란과 개발이익 환수문제가 1990년 병문천 복개와 장학기금을 조성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이다.
당시 도민들은 (주)제주해양개발과 (주)범양건영이 추진한 탐동매립 사업을 환경파괴라며 반대했었고, 매립이 기정사실화됐을 때는 매립한 땅의 절반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었다.
이 때 제주도당국과 제주시가 제시한 방안이 바로 병문천 복개사업이었다. 당시 제주도와 제주시가 이 사업을 제시한 이유는 병문천에 더러운 물이 흐르고 악취가 심하기 때문에 차라리 이를 덮어 버리면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며, 복개한 부분을 도로와 주차장으로 활용하면 교통문제를 해결하고 시의 수입도 늘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탑동문제해결범도민회는 매립 자체가 환경파괴였는데, 그 대가로 또 하나의 환경파괴를 제안한 꼴이라며 반대했었지만 묵살됐다.
이런 논란과 우여곡절끝에 복개사업은 1993년 초부터 시작됐다. 사업구간은 병문천 하류에서 종합경기장 인근 서광로 오라교에 이르는 2,058m. 사업비는 2백억원이 들 것으로 추정됐다.
탑동이익환수라는 거센 구호와 논쟁의 산물인 병문천 복개사업은 하천 일대 교통소통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도심 주차난을 해소시키는데는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천의 원형을 잃어버림으로써 생태계를 파괴했다는 부끄러운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게 되었다.
수천, 수만년에 걸쳐 형성된 병문천 하류의 멋스러움과 바위들은 사라졌고 그 위를 콘크리트가 덮어버렸다.
복개된 병문천 하류에는 더 이상 새들이 찾아와 지저귀지 않는다. 하천 바위 틈새로 피어나던 풀꽃과 비가 오면 개울을 이루던 모습도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게 됐다. 이게 1990년대식 도시개발의 모습이었다.
▶한천
한천은 한라산을 기점으로 제주 제일의 하천이라 할만하다. 한천은 한라산 정상에서 시작돼 제주시 탑동 서쪽 용연에 이른다. 한천은 수려한 경관과 수자원, 역사유적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주의 어제와 오늘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천에 대한 기록으로는 조선시대 이원진 목사의 탐라지(眈羅志)에 이르길 `한내(大川)는 주성 서쪽 2리경에 있다. 하류로 흘러가 끝나는 곳이 한두기이다. 한내의 아래쪽은 용수라 하는데 깊어서 밑이 없고 길이는 백보정도 된다. 가물 때 이 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한천의 명칭에 대한 기록은 이규성 목사가 1709년에 그린 탐라지도병서(眈羅地圖竝書)에도 나타난다. 여기에도 한천을 대천(大川)으로 표기하고 있다.
제주시내를 관통하는 한천은 `한라산의 혈'을 이어주는 혈맥으로 회자된다. 선인들은 한라산의 혈맥이 한천 상류 장구목과 삼각봉, 개미등을 따라 제주대학교 뒷편 산천단 인근 삼의양오름에서 한번 멈춘뒤 동으로 원당봉, 서쪽으로는 도두봉으로 연결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옛 `제주牧'이 서 있는 것으로 믿어왔다.
한천은 하류 용담을 거슬러 오라, 오등동을 가로지른다. 한천 유역에 거주하는 주민은 2004년말 현재 용담1동 9천1백80명, 용담2동 1만7천4백13명, 오라동 5천7백75명, 오등동 1천5백53명 등 3만3천9백21명이다.
한천 유역엔 많은 역사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하구 용연은 달밤에 배를 띄우고 그 위에서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수많은 전설과 제주민들의 풍류가 깃든 곳이다.
용연에서 남쪽으로 4백여m 하천 인근에는 통일신라시대인 고대 탐라국의 제사유적으로서, 고대 탐라후기의 문화와 당시 생활상을 반추해 볼 수 있는 용담동 유적지가 자리잡고 있다. 조금 거슬러 종합경기장 일대에 오라동에 이르면 조선 순조때 목사 한응호의 선정을 기리는 거사대가 서 있다.
오등동 방선문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전통문화의 자취를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명소이다. 조선조 목사와 시인 묵객 풍류객들이 계곡에 피어난 영구춘화를 즐기며 한시와 마애명을 30여곳 기암괴석에 새겨놓아 더욱더 유명한 곳이다. 특히 이곳은 백록담에서 이어지는 신선사상이 전해지는 매우 이색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방선문은 오라골프장을 가로지른다.
상류 발원지 부근에 이르면 산신제터와 연대가 설치되었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선인들은 국왕의 명을 받아 한라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 터가 백록담 북쪽 모퉁이 한천 발원지라는 사실이다. 그 바로 아래 동쪽에 우뚝 솟은 왕관바위는 육지부와 연락이 닿았을 연대가 설치돼 교신했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하계망(河系網)은 하천의 본류와 그에 합류하는 지류를 이루는 하천의 망을 일컫는다. 하계는 본류와 지류의 합류상태 등에 따라 수지상(樹枝狀), 격자상(格子狀), 평행상, 방사상(放射狀) 등으로 분류하는데 한천은 바퀴살 모양으로 중심에서 그 주위 사방으로 내뻗는 형태의 방사상수계를 이루고 있다.
한 유역안의 수계에 있어 최상류에 있는, 전혀 지류를 가지지 않는 제1차수, 둘 이상의 1차수가 합류하는 2차수, 또 몇 개의 2차수가 합류하는 3차수라고 할 때 한천의 하천 차수는 4차수까지 추적된다.
한천 유역은 매우 복잡한 하계망을 보이는데 특히 중류 열안지오름과 상류 탐라계곡 일대 하계망이 매우 복잡하다. 하계밀도는 하류에 이를수록 미약하다.
한천은 한라산 정상 북벽 일대에서 발원하는 동탐라와 장구목과 삼각봉에서 발원한 서탐라 등 두 갈래로 나뉘어 많은 지류들과 합류하면서 하구 용연으로 이어진다. 하구에 이르기까지 왕관바위와 삼각봉, 삼단폭포, 방선문으로 이어진 주위 경관은 제주를 대표할만한 비경들이다.
제주 화산섬에서 동서 해안지역과 남북사면은 매우 다른 지질구조를 갖고 있다.
동서사면에는 하천의 발달이 거의 형성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천폭이 넓고 바다로 유유히 흐르는 하구 형태를 보여준다. 반면 한라산의 남북사면에 형성된 한천(제주시)과 효돈천(서귀포시)은 깊은 V자형 계곡을 이루고 있다.
한천이 발원하는 한라산 정상 북벽은 풍화작용이 심화되고 있다. 백록담 북벽의 수직절벽으로 된 U자형 계곡의 벽면은 현재도 조면암의 표면 풍화로 한꺼풀씩 하부로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앞으로도 이 지역은 풍화작용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므로 먼 훗날에는 북벽과 서북벽 자체가 대부분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
한라산 북사면의 백록담 아래로 형성된 `탐라계곡'과 `서탐라계곡'은 한천의 상류가 되고 있다. 발원지 주변 지형은 깊은 계곡과 함께 조면암의 봉우리와 빙하성 능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백록담 북벽과 왕관능, 장구목 계곡에서 탐라계곡이 발원하며, 삼각봉과 큰두레왓에서 서탐라계곡이 발원하고 있다. 이 두 계곡을 사이에 두고 개미목 능선이 길게 이어져 있다. 이 능선상에 관음사 코스의 등반로가 개설되어 있다.
탐라계곡과 서탐라계곡은 깊은 계곡을 형성하며 직선상으로 발달한다. 계곡은 수많은 용암폭포가 형성되어 높은 고도차를 극복하고 있으며 탐라계곡의 이끼폭포, 비단폭포와 같은 곳에서는 많은 양의 계곡수가 용출하여 흐르고 있다. 능하오름 옆에서 탐라계곡과 서탐라계곡은 합류하여 여전히 깊은 계곡을 형성하여 북진한다.
오라골프장 주변 하천 바닥에서 형성된 아치형의 방선문은 일종의 용암교의 형태를 하고 있다. 방선문은 두꺼운 용암류의 하부에 발달된 수평으로 깨진 틈들이 정규적으로 형성된 판상절리가 하천수에 의해 연속적으로 침식을 받음으로써 한 장씩 무너진 결과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한천 하류 지역에 해당되는 오라동 주변에서도 하천의 모습은 여전히 고지대 상류 계곡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것은 제주도 하천인 건천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경사가 심한 화산지형을 극복하는 과정이며, 아름다운 하천 바닥의 암반 모습은 호우시에 고지대로부터 순식간에 쏟아져 내리는 많은 양의 하천수와 함께 날라져 온 큰 암석 덩어리들이 연속적으로 하천 바닥의 암반을 마모시킨 결과 만들어진 것이다.
한천 하구인 용연은 두께 10여m의 매우 두꺼운 용암류로서 하천 좌우현 벽에는 수직절리가 특징적으로 발달해 있다. 용연 하구의 형성은 용암류에 발달된 수직절리가 절리면을 따라 무너져 내리면서 만들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도내 대부분의 하천은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어서 아쉬움을 준다. 한천의 풍부한 용천수는 그래서 그 가치를 더욱 빛낸다.
한여름에도 마르지 않는 이곳 용천수는 크게 용진각물과 용진굴물로 대표된다. 해발 1500m 인근에서 용출하는 용진각물은 삼각봉 밑에서 용출하는 용진굴과 합류하면서 그 양이 크게 불어난다. 용진굴물의 1일 용출수는 3백60여톤(99년 5월 제주도수자원개발사업소 조사)에 이른다.
탐라계곡을 적시는 이 용천수는 2㎞ 넘게 이어지면서 곳곳에 그림같은 폭포수를 빚어내고 있다.
▶화북천
별도천(別刀川)으로도 불리는 화북천은 제주시 동부지역 대표적 하천이다. 화북천은 유역에 많은 문화 유적을 끼고 있는 곳으로도 의미가 깊다.
화북은 옛 제주의 관문인 화북포구가 있는 지역으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진성과 비석거리, 해신사, 연대, 전통 와가(瓦家)를 화북에서 엿볼 수 있다. 하천을 끼고 마을이 형성되고 그 주변에 풍성한 자취를 남겨놓았다.
화북포구는 제주성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던 포구로 조선시대 조천포구와 함께 제주의 관문이 되었다. 영조 13년(1737년)에 항만이 불완전하여 풍랑이 일때는 항내에서 파선되는 일이 잦아 목사 김정이 몸소 돌을 지어나라는 등 앞장서서 방파제와 선착장을 축조했다. 조선조 5백년 동안 많은 유배인과 3읍 수령이 왕래했던 곳이다.
화북포구에 있는 해신사(海神祠)는 해신을 모신 사당이다. 지방 기념물 22호. 순조 20년(1820)에 한상묵 목사가 해상활동의 안전을 기하기 위해 화북포 해안에 사당을 짓고 매년 정월 보름에 해신제를 지냈다.
화북진성은 화북1동에 남아있는 성터로, 숙종 4년(1676) 겨울에 최관(崔寬)목사가 진영을 설치하여 둘레에 성을 쌓았다. 동쪽과 서쪽 방향으로 두 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 그 중 서쪽 성문은 포구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성안에는 군기고와 객사, 망양정이 있었고, 그 중 객사는 환풍정(喚風亭)이라고도 하였다. 현재 화북포구 동쪽 동마을복지회관 옆에는 화풍대(和風臺)라는 표석이 남아있는데 옛날 화북포구를 이용했던 사람들이 폭풍우를 만났을 때 순풍을 기다리며 머물던 곳으로 보인다.
화북동 비석( 碑石)거리에는 지금도 13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주로 목사들의 치적을 기리는 공적비로 제주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화북마을에 세워진 것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이밖에도 화북은 `애랑'이가 숱한 관원들과 이별했던 공간으로 묘사된 `배비장전'의 무대라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
도기념물 23-9호인 화북연대는 통신시설 발달 이전 화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용담동 수근연대와 동쪽으로는 조천연대와 연락을 취했던 곳. 지금의 연대는 2001년에 복원된 것이다.
화북천 하구 해안에는 제주외항개발사업이 한창이다. 국제자유시대를 맞아 제주항을 동북아 중심항으로 격상시키기 위한 전초기지로 개발하겠다는 구상이다. 2001년말 착공된 이 사업은 공사기간이 19년간의 대역사다. 이 공사가 마무리되는 2019년 제주항은 8만톤급 1척, 2만톤급 2척 등 5천톤급 대형선박 7척을 접안할 수 있는 동북아 거점 물류항으로 성장하게 된다고 한다.
화북천 하구 연안의 해양환경의 오염이 우려된다는 지적이 여전히 많은 가운데 동북아 중심 항만과 자연경관을 활용한 환경친화적인 미항건설이라는 두 가지의 목표 실현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별도봉과 사라봉 사이에는 별도봉 알오름이라고 하는 조그만 오름이 끼어 있다.
ꡒ이 오름은 층리가 잘 발달된 수리쇄설성 퇴적층으로 되어 있으며 해안선을 따라서 약 7~8m의 두께로 20m 구간에 걸쳐 소규모로 노출되어 있다. 바로 이 퇴적층 속에 박혀 있는 화강암의 덩어리가 제주도의 지하 깊은 곳에는 어떤 암석으로 되어 있을까하는 의문을 풀어주는 실마리가 되었다.ꡓ(강순석 박사, 제주지질연구소장)
이 화강암은 경상도 지역에 넓게 분포되어 있는 중생대 불국사 화강암으로서, 이로부터 제주 화산체의 밑바닥에는 한반도와 같은 불국사 화강암으로 되어 있을 것이라는 가상을 할 수 있었다고 강 박사는 덧붙였다.
별도봉 동쪽을 끼고 있는 화북천 하구는 두 갈래다. 제주도내 대개의 하천이 하구에 이르러서는 한 줄기로 합쳐져 바다로 이어지는데 비해 특이한 하구 구조라 할 수 있다. 화북천 하구는 원래 두 갈래이지만 호우 때 하수펌프장 일대 범람 우려로 하구 한쪽 갈래가 인위적으로 매립돼 지금은 한 갈래만 확인할 수 있다.
탐라지(耽羅志․1653)에는 화북천을 가리켜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나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나면 급히 흘러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은 화북천 전체의 특징을 설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적어도 하류는 물이 비교적 풍부한 친수공간이다.
바다와 만나는 하구 일대는 건천이지만 조금만 거슬러 오현고등학교 부근에 이르면 용출수가 풍부한 친수공간을 확인할 수 있다.
화북천은 하류지역은 원형이 상당히 훼손돼 있다. 하지만 곳에 따라서는 벼랑과 나무, 그리고 바닥에는 깊은 웅덩이와 저절로 다듬어진 자연석이 깔려 있어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한다.
화북천은 제주대학교 교수아파트 서쪽을 끼고 산천단 남동쪽에 위치한 삼의양오름 기슭으로 통하고 관음사로 이어진다. 이 하천의 가장 고지대 발원지는 흙붉은오름 일대다. 발원지는 흙붉은오름 동남 방향을 거의 반바퀴 휘돌아 감고 있는 형태다. 해발 1,350m쯤 된다.
▶산지천
산지천은 한천, 병문천과 더불어 제주시 도심을 관통하는 3대 하천 중 하나이다. 특히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만 해도 제주시민들에게 식수를 제공했던 `물의 하천'이며 제주의 역사와 수많은 사연이 녹아 흐르고 있다. 한때 복개로 인해 시궁창으로 전락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건물과 복개 구조물이 철거돼 하천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사라졌던 숭어와 은어가 돌아오고 제주시민들의 새로운 쉼터와 문화공간을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
산지천(산지내) 하구의 옛 모습은 빛바랜 사진과 그림을 통해서만 남아 있다. 초가와 갯가 지형에 따라 작은 배를 대었고 사람들이 이동했던 자연포구였음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벌거벗은 채로 벗들과 멱감던 추억과 아낙네들이 빨래하고 허벅으로 물을 길러 나르던 정겨운 풍경이 있던 곳이 바로 산지내였다.
해안으로 길게 뻗은 동․서부 두 방파제와 각종 대규모 항만시설, 빙딩 숲을 이룬 현재의 모습에서 옛 산지천 포구를 떠올린다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산지 하구였던 용진교 일대는 탐라 개벽설화에 나오는 건돌개(健入浦)터. 고대 탐라 때의 교통항으로 추정되는 곳이며 1897년부터 기선이 취항하면서 명실상부한 제주도의 주 교통항으로 발전하였다. 굶주린 백성을 구제한 사회복지가로 이름을 날린 김만덕의 객주터도 산지포구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용연, 외도월대, 방선문 등 성 밖의 명소를 제외한다면 제주의 명소는 대부분 산지천을 끼고 있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금산(禁山). 제주성 북성 문턱에 막바로 바다에 낭떨어지를 이루며 우뚝 뻗은 이 언덕에는 제주 특유의 난대림이 우거져 오랫동안 입산이 통제되면서 `금산'이란 이름이 생겼다. `영주십경'의 하나로 꼽는 `산포조어'는 바로 이 언덕에서 바라보는 풍경이었다.
제주의 역사와 문화가 녹아 있는 산지천 하류는 1960년대 후반 도시화와의 물결을 타고 일부 구간이 복개되고 상가건물이 들어서면서 옛 모습을 잃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복개 구조물이 노후되고 안전상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 복개구조물을 철거해야 한다는 안전진단결과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복개 구조물이 철거되고 복원을 위한 첫 삽을 뜨기 까지는 많은 논의와 우여곡절이 있었다. 상권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다시 복개를 해서 주차장으로 활용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산지천의 옛 공간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시민 다수의 바람을 꺾지는 못했다.
결국 산지천은 동문교에서 하구 용진교간 474m 구간에 걸쳐 1백10억원의 넘은 예산을 들인 끝에 시민들의 쉼터로 돌아왔다.
산지천 복원 구간과 연결된 곳이 도내 최대 재래시장인 동문시장이다. 하구의 복원과 남수각 수해상습지 정비사업으로 동문시장도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현대식 대형할인매장이 속속 들어서면서 전통의 재래시장이 위기를 맞고 있지만 삶의 체취가 묻어나는 여전히 정겨운 곳이다.
시장을 벗어나면 상류는 몇년전 정비된 남수각 수해상습지이다. 주변 무허가 건물들도 대부분 철거된 모습이다. 이 일대는 비만 오면 하천이 범람해 많은 침수피해가 났던 발생했던 곳이다. 가장 최근의 물난리는 1999년 7월 가옥 1백70동이 침수된 사례가 있다. 이후 제주시는 190억원에 이르는 많은 예산을 들여 동문교~오현교 남수각 일대 하천을 정비하고 주변 건축물을 다른 곳으로 이전시켰다. 또 단골 민원이었던 이 일대 주차난을 해소하기 위해 주차공간을 확충해 재래시장 활성화도 꾀하고 있다.
남수각 일대는 제주도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제주성지이며, 제주성 남수문이 있던 터가 바로 남수각이다. 성 안에는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했던 다섯 분을 배향했는데 바로 오현단이다. 충암 김정선생과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선생이 그들이다.
오현교를 벗어나면 하구와는 달리 하천은 비교적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깊은 절벽과 집채만한 바위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곳은 환경오염사각지대로 방치되고 있다.
산지천 하류는 제주의 대표적 역사문화유적지와 관광명소를 끼고 있다. 오현단을 거슬러 올라가면 사적 제134호로 지정된 삼성혈을 비롯해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신산공원, 문예회관이 모여 있다.
산지천 변에 이같은 명소가 자리하고 있음에 다라 이 일대와 산지천 하구까지 연결해 문화관광벨트화하는 구상이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도심 한복판에 연중 마르지 않는 산지천의 용출수를 확대 재현해야 한다는 여론은 더욱 공감대를 얻고 있다.
제주경찰서를 지나 택지개발이 이루어진 일도2동 제주학생문화원과 수운공원 일대는 비록 하상은 정비돼 원형이 훼손됐지만 비교적 계획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도시계획 지구로 정비돼 하천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 주택지가 조성되면서 하천의 오염원이 차단돼 있다. 하천내에서 채소를 재배하는 광경도 볼 수 있다.
산지천은 돌공원인 목석원과 삼의양오름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화북천과 더불어 산지천에도 일제가 구축한 진지동굴이 집단 분포해 있다. 해발 440~480m 일대에 진지동굴로 보이는 인공굴을 확인할 수 있다.
산지천 상류 지점인 산천단 일대는 일제말 일본군이 집단 주둔했던 장소로 알려진 곳이며, 당시 일제 방어진지로써 대규모 진지동굴이 구축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화북천과의 진지동굴과도 상호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천은 깊은 V자형 구조를 보이다가 발원지가 가까워지면 완만해지고 발원지에 이르면 결국 평지의 모습을 띈다. 해발 570m쯤 되는 지점이다. 주변은 목장지대이고 관음사, 산록도로와 닿아 있다.
▶효돈천
한라산 북사면을 대표하는 하천이 한천이라면 효돈천은 한라산 남사면을 대표하는 산남 최대의 하천이다.
효돈천의 옛 이름은 호촌천(狐村川)이었다. 고려 충렬왕 26년(1300년) 지금의 하례지역은 도내 14개 현의 하나인 호촌현(후에 狐兒縣으로 개칭)의 중심지였다. 호촌천은 여기에서 유례했다. 1861년 김정호가 제작한 `제주삼읍전도(濟州三邑全圖)'와 비슷한 시기의 `동여도(東輿圖)'에도 지금의 하례지역을 호촌으로, 하천은 호촌천, 하류의 포구는 호천포구, 예촌봉은 호천봉으로 각각 표기해 놓고 있다.
그러나 호촌이라는 지명은 1899년 제작된 `제주군읍지'중 제주지도에 상․하례리라는 지명과 함께 호촌봉도 예촌봉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다만 하천을 경계로 효돈과 하례리 양 지역이 나눠지는데다 역사적으로 효돈 지역 못지 않게 하례마을도 하천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기 때문에 효례천으로 부르자는 몽리 주민들의 주장도 상당한 근거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오래 전부터 하례리에서는 효돈천을 효례천으로 불러 왔고 하례와 효돈을 잇는 다리 이름도 `효례교(孝禮橋)'임을 거론하며 효례천이 아닌 효돈천이라는 명칭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효돈천 주류는 서북벽과 서벽, 남벽등 한라산 정상의 거의 절반을 발원지로 하고 있다. 효돈천의 규모를 능히 가늠케 한다. 이 주류는 방애오름을 사이로 웅장한 규모의 서산벌른내와 산벌른내를 거쳐 미악산 상류에서 합류, 돈내코로 이어진다. `벌른'은 어떤 물체를 양쪽으로 갈라놓거나 깨트린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산벌른내는 바로 한라산을 갈라놓은 하천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얼마나 계곡이 깊고 넓으면 `한라산을 벌른내'라고 했을까.
효돈천의 하계(河系)는 미악산 상류(해발 610m)가 중요한 분수령이 되고 있다. 이는 도보탐사와 항공탐사를 통해서도 직접 확인된다. 정상에서 발원한 두 갈래의 효돈천은 서귀포시 중심부를 향해 수직으로 뻗다가 바로 미악산 상류부에서 한 갈래의 주류로 합류한 이후 이내 급격하게 오른쪽(동남방향)으로 휘돌고 있다. 미악산의 화산분출활동이 효돈천의 유로를 바꿔놓은 것이다. 미악산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효돈천은 돈내코와 상효, 하효, 하례리를 거치지 않고 미악산 화산분출 이전에 형성된 고(古)하천을 따라 서귀포 중심부로 관통했을 것이란 추적이 가능하다. 유로를 바꾼 효돈천은 돈내코 계곡을 거쳐 상효동 칡오름 상류에서 다시 합류한다. 정상에서 발원한 주류와 합류한 계곡은 백록계곡(선돌계곡)으로 이어진 또 하나의 주류이다. 합류지점에 이르러 계곡은 더욱 넓고 웅대해진다. 효돈천은 남원읍 하례리 지역에 위치한 걸서악을 만나 남쪽으로 유로를 바꾸면서 하류 해안 `쇠소깍'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라산 정상에서 시작된 효돈천은 해안에 이르는 동안 주변에 많은 주거공간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서귀포시와 남원읍을 끼고 있는 효돈천 유역에는 9개 마을이 들어서 있다.
서귀포시의 경우, 하효와 신효, 토평, 서상효, 동상효, 법호촌, 웃법호촌, 입석동이 그것이고 남원읍지역에는 하례마을이 자리해 있다. 이들 지역에는 3천9백여세대에 1만3천1백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 곳 주민들은 효돈천과 더불어 동고동락해 왔다. 하류는 주로 효돈과 하례리 주민들의 생활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해안 쇠소깍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저마다 사연을 간직한 긴소, 웃소, 댁물, 남내소등 크고 작은 소(沼)들이 이어진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호연지기를 키우고 삶의 지혜를 터득했다. 주민들은 옛부터 돈내코와 백록계곡의 용출수를 식수로 이용해왔다. 하천변에서 감귤 등 작물을 경작하는 주민들은 효돈천의 풍부한 하천수를 양수기로 끌어다 농업용수로 활용하고 있으며 여름철 이른바 물맞이 장소로도 이용하고 있다.
효돈천은 역사․문화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이 중에서도 영천관은 서귀포시가 간직한 몇 안되는 문화유적중 가장 대표적인 관아터로 도내 숱한 관아 유적중에서도 독특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했던 곳이라는 점에서 발굴과 복원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특히 영천관은 그 주변에 영천사지와 기생의 슬픈 전설이 깃들어있는 예기소, 사철 물이 그치지 않는 계곡과 울창한 난대림속에 위치해 있을뿐만 아니라 시민과 관광객들이 접근하기 쉬운 지리적 여건 등을 고려할 때 문화 관광지로서 개발 잠재력이 풍부한 곳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례 지경에는 한때 도 전역에 비석을 공급했던 채석장이 확인됐다. 채석이 이루어졌던 현장에는 지금도 비석 잔해가 곳곳에 남아 있으며 깎여진 절벽 암석이 난대림 활엽수림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제주 도내 하천은 대부분 건천(乾川)이다. 그래서 많은 하천들은 빼어난 경관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을 준다. 효돈천도 엄밀한 의미에서 건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내 어느 하천보다 하천수가 풍부하고 곳곳에 폭포수를 빚어내고 있어 건천임을 무색케한다. 도내에서 으뜸가는 하천계곡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 중에서도 돈내코와 백록계곡, 민가 인근에 발달된 갖가지 소들은 효돈천이 아니고서는 접할 수 없는 소중한 자원이다.
해발 1,680m의 백록샘. 한라산은 물론 남한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샘솟는 이 샘이 바로 효돈천의 한 줄기이다. 효돈천의 수자원은 선돌계곡(백록계곡)과 돈내코계곡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이른바 물 좋기로 소문난 이 곳이 있었기에 효돈천의 명성을 빛낼 수 있었다. 하나같이 울창한 상록활엽수림대를 사이로 한여름에도 얼음같이 차고 맑은 물이 그칠줄 모르고 용출하고 있는 사실이 대부분 건천인 계곡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선돌계곡. 해발 5백75m 지점에서 용출, 남서교 상류 선도암 부근에 이르기까지 맹렬한 기세로 용암으로 뒤덮힌 하상을 흐르고 있다. 용출지점 하류에는 간이취수장이 설치돼 있으며 입석동과 하례리 일부 주민들이 이 물을 식수로 이용하고 있다.
돈내코계곡은 해발 385m 지점에서부터 용출한 하천수가 울창한 천연림을 뚫고 흐르면서 돈내코계곡을 대표적인 생태휴식관광지로 부각시키는 근원이 되고 있다. 이 두 지점의 용출수는 칡오름 앞에서 하나로 모아져 효돈천 하류로 이어진다. 계곡은 상효와 효돈, 하례리 마을을 끼고 크고 작은 소(沼)를 빚어내며 다시 한번 아름다움을 뽐낸다.
▶동홍천
동홍천은 정방천으로도 불린다. `영주십경'의 하나인 `正房下瀑'으로 유명한 정방폭포를 하구에 거느리고 있는 하천이다. 정방폭포에서 바라보는 해안 풍광은 한폭의 그림이다. 동쪽으로부터 섶섬(숲섬)과 문섬, 새섬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전면에 배치돼 있다.
옛 사람들의 감흥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이원진 목사의 `탐라지'와 이형상 목사의 `남환박물지', 이원조 목사의 `탐라지초본'에는 정방폭포의 빼어난 경치를 예찬하는 글이 실려 있다. 이원진 목사가 읊은 시 한 귀절도 그런 예찬송의 하나다.
`절벽 낭떠러지에 채색안개 걷히니/ 나는 문득 폭포가 하늘가에 걸린 것을 보았네/ 은하수는 바로 큰 바다로 떨어지는데/ 8월의 뗏목 위에서 나도 신선을 닮고자 하네'
정방폭포는 빼어난 경치와 함께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진시황에게 바칠 불로초를 찾기 위해 동남동녀 5백명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인 한라산을 찾아왔던 서복(徐福)과 관련된 전설이 그것이다. 진시황과 서복의 불로초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로 치부되었으나 향토사학가들의 연구에 힘입어 역사적인 사실로 점차 규명되고 있다.
정방폭포 상류 정방수원지 상류 50m 지점(일주도로변 서신교에서는 20m하류)에 폭포를 거느린 커다란 소가 위치하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고냉이소'라고 불린다. 폭포는 높이가 5m쯤 되며 그 아래 물웅덩이는 원통형 모양으로 직경이 10m가 넘는다.
동홍천 하류 일주도로변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서귀포중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산남지역 많은 원로들이 서귀중이 배출한 인물들이다. 1936년 5월 농업실수학교로 개교, 1950년 서귀농업중학교로 개편되었고 1951년 교육법 일부 개정에 따른 조치령에 의해 서귀중학교로 변경됐다.
동홍천은 주민들에게는 `애이리내' `애릿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애린내에 대해서는 정확한 유래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하천 주변에 애기무덤과 골총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대신로(일호광장에서 동홍동으로 이어지는 길)는 아주 좁은 소롯길로 구덕을 장사하는 사람들이 왕래하던 길로서 그 길도 `애린내길'이라고 불리었다 한다.
애린내라는 명칭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지만 밭을 일구러 왕래하다 보면 죽은 애기를 애기구덕에 들고 와서 하천 부근에 뭍고 그 위에 애기구덕을 엎어 놓은 광경을 보면서 가슴이 아파했었다 하면서 하천부근에 묘를 쓰는 것과 연관지어 지명이 유래된 것이 아닌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옛날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무덤들이 있던 자리에는 상가와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일부에서는 동홍천의 하류이기 때문에 `아랫내', `애릿내' 등으로 불려진다는 설도 있다.
정방천의 주류인 서귀포시민회관 일대는 복개돼 외형상 하천의 흔적이 사라졌다. 시민회관 일대를 벗어나면 빼곡히 들어찬 주택가 사이로 정방천의 흔적이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중앙동을 지나 동홍동사무소에서 중산간도로를 따라 서쪽 150m 지점에 동홍교가 있다. 바로 그 아래에 5월 장마때 천둥치고 난 후 이곳에서 구멍이 터진다는 `산딧물' `산지물' `산지천'이 자리잡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지명과 유래이다. 제주시에 최근 복개하천이 복원된 산지천과 이름이 같을 뿐만 아니라 인연도 깊다. 유래에 따르면 제주시 산지천을 `큰딸'이라 불렀으며 겨울에는 딸이 친정에 가기 때문에 여름에만 솟아난다고 하였다.
동홍천 상류는 마을권을 벗어나 목장지대다. 서귀포지역 최대 목장지대인 금성목장이 있는 곳이다. 동홍천 상류는 아직도 하천화가 진행되는 흔적들이 엿보인다. 하천은 미악산에서 서쪽 직선방향에 이르자 급격하게 좁아졌다. 5m 이내로 어떤 곳은 나무들로 빼곡히 채워져 1m 안팎에 불과한 곳도 있다. 발원지에 가까운 동홍천 상류는 미악산 서쪽을 휘감아 북서진하고 있다. 미악산 동쪽에는 효돈천이 자리잡고 있다. 한라산 서벽과 남벽에서 발원한 효돈천은 산벌른내와 돈내코를 거쳐 효돈 쇠소깍으로 이어지는 대천이다.
효돈천은 원래 한라산 정상부에서 발원하여 직선상으로 흘러 서귀포시의 `애이리내'(동홍천)로 이어져야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 왜 효돈천이 중상류에서 오른쪽으로 휘돌아 흘러 멀리 효돈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한라산 고지대에서는 연속적인 용암류의 분출이 하천의 유로를 결정하였고, 해발 450m의 중산간지대에 자리잡은 미악산의 화산분화활동은 효돈천의 유로를 가로막아 효돈천을 오른쪽으로 발달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즉, 미악산의 화산분출활동이 없었다면 지금의 효돈천은 돈내코와 상효, 하효, 하례리를 거치지 않고 미악산의 화산분출활동 이전에 형성된 고(古)하천을 따라 동홍천 주류인 서귀포 중심부를 관통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연외천
서귀포에서 바라본 한라산은 그 품에 70리의 꿈을 껴안고 있다. 지난날 옹기종기 초가가 들어섰던 자리, `돌빌레왓'의 자리에 아담하게 가꾸어진 전원도시. 세계적 관광도시인 서귀포시의 색깔을 더욱 빛나게 하는 곳이 천지연이고 그 하류에 살포시 자리잡은 항구가 바로 서귀포항이다. 서귀포를 수전포(水戰浦)라고도 했는데 항구가 매우 넓어 절벽을 의지하면 수백 척의 배를 감춰 둘 수가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연외천의 하구는 바로 서귀포항이다. 또 서귀포항 맞은 편에 버티고 서 있는 무인섬인 새섬(일명 조도)이 하구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형태다. 한때 허허벌판이었던 새섬은 지금은 울창한 소나무림으로 변했다. 천지연과 서귀항으로 연결된 하천의 정식 고시된 명칭은 연외천(淵外川․지방 2급)이다. 서귀포시에 따르면 연외천은 서홍동에서 발원해 천지동 해안으로 이어지며 주류 하천의 총연장은 9㎞.
연외천은 하천을 끼고 있는 마을에 따라 불리는 이름도 서로 다르다. 연외천(서홍동, 서귀동), 생수천․서홍천(서홍동), 호근천․원제천(호근동), 그리고 천지연 폭포 상류 연외천과 호근천이 합류하는 곳에서는 `선반내'(솜반내)로 불린다. 지류까지 합치면 연장은 30.2㎞에 달한다는게 서귀포시의 설명이다. 항공에서 위성 촬영한 연외천의 하계망을 보면 지역에 따라 달리 불리는 하천 지명 만큼이나 실핏줄처럼 복잡하게 연결돼 있다.
연외천 하구 유람선이 있는 곳은 고동이 잘 잡히는 곳이라 하여 `문다두리코지'라 불렸던 곳이다. 또 이곳은 일제때 고래공장터로 일본인들의 포경산업의 전진기지였다.
고래공장터 서쪽 해안 절벽지대가 바로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이다.
서귀포층은 신생대 제4기(플라이스토세) 초기(약 1백64만년~73만년전)에 형성된 퇴적층으로 알려져 있다. 1923년 일본인 고생물학자인 요코야마박사에 의해 최초로 연구조사된 이후 지난 95년 강순석박사(현 제주지질연구소장)는 이 곳에서 77종의 패류화석을 분류하여 보고했다.강박사는 ꡒ약 1백만년 전 당시의 환경을 알기 위해서는 서귀포층의 연구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우리나라 주변에 어떤 생물들이 살고 있었으며 환경은 어떠했는지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서귀포층의 화석을 연구해야만 가능하다. 서귀포층의 연구에 의해서만 당시 동북아시아의 과환경 연구가 가능할 만큼 서귀포층은 우리나라 한반도의 남부지역에 위치하여 지질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에 위치해 있다.ꡓ고 말한다.
서구포의 자랑인 천지연도 연외천 하류에 있다. 연간 국내외 관광객 1백50여만명이 찾는 곳. 기암절벽이 하늘을 가릴 듯이 치솟아 있다. 그 절벽에서는 하얀 물줄기가 무지개 빛을 뿜으면서 쏟아져 내린다. 계곡 양쪽에는 난대성 식물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선계(仙界)가 있다면 이곳을 일컬었으리라. 천지연 주변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 모두 세곳이나 된다. 난대림지대(379호)와 담팔수 자생지(163호), 무태장어 서식지(27호)가 바로 그것이다. 단일 지역에서 세곳이나 국가지정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매우 드문 경우다.
천지연 일대는 80년대 들어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84년 전국소년체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상가가 조성되고 대규모 주차장이 정비됐다. 천지연 하류에 있던 무허가 건물도 상당수 철거됐다. 천지연 계곡 중앙에 있었던 서귀포수력발전소와 호텔(부림장)터는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1943년부터 가동되기 시작한 수력발전소는 1970년대 초 제주․한림발전소의 전력공급량이 늘기 전만해도 서귀포와 남군 일대에 전력을 생산해 공급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천지연으로 이어지는 하천 줄기 중에는 `하논'이라는 비경이 감춰져 있다. 하논은 논이 많아 `대답(大沓)'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국내 최대 규모의 마르형 분화구 일뿐만 아니라 수만년전의 고환경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퇴적층으로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곳이다. 생태학자들은 이곳을 생태복원해 자원을 보존하고 활용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귀포 사람들은 천지연폭포 상류 하천을 가리켜 솜반내(선반내)라고 부른다. 연중 용출수가 흐르는 이곳은 물이 맑고 깨끗할뿐만 아니라 수량이 풍부해 예나 지금이나 여름철 시민들의 냉수욕과 휴식공간으로 애용되는 곳이다.
솜반내 일대에는 생태공원이 조성됐다. 걸매공원이 그것이다. 솜반내와 옛 선일포도당 공장 일대에 조성된 걸매공원은 연중 흐르는 풍부한 용출수와 하천, 울창한 난대 상록활엽수림, 야생 조류가 풍부해 생태공원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귀포시 서홍동 서홍다리 쪽에 이르면 솜반내의 용출량은 절정을 이룬다. 서홍다리에서 연외천은 합류한다. 한 쪽은 호근동에서 내려온 줄기이고 다른 한쪽은 서홍동사무소 옆을 지나쳐 남류하는 연외천 본류이다. 서홍다리를 거슬러 호근동 방면은 연외천 본류에 비해 훨씬 많은 수량을 용출하고 있다. 이 곳 주민들은 맑고 풍부한 수량을 간직한 연못들을 가리켜 `종남소' `웃솜반내' `도암소'라 부르며 미역을 감고 더위를 식혔다.
그러나 용출량은 갈수록 줄어 옛 솜반내의 명성도 잃어가고 있다. 콘크리트로 둘러쳐진 용출 지점 곳곳이 물 한방울 나지 않은채 메말라 있고 물이 흐르더라도 그 양이 매우 적다.
연회천 주류의 발원지가 가까워지면 계곡은 지면과 거의 평탄면을 이룬다. 대개의 하천이 그렇듯이 발원지가 가까워지면 이내 계곡의 형태를 모습을 감춰버린다.
▶도순천
강정은 옛부터 `일강정(一江汀)'으로 도민사회에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쌀이 귀한 제주지방에서 이곳 강정에서 생산되는 쌀 품질이 제일 좋다는 평가에서 유래된 말이다. 밭벼에서 나온 쌀마저 맛보기 힘들었던 시절에 `나룩'을 생산할 수 있는 논을 가졌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타 지역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강정은 이런 자부심에서 나온 말이다.
강정의 자부심은 이런 논에서 솟아났고, 그 바탕에는 사철 흐르는 강정천(옛날에는 加內川, 도는 加來川이라고도 불렸다)이 있기에 가능했다. 강정천의 공식 하천명은 도순천이다. 벼농사가 성행했던 강정천 하류에는 선사시대 유물이 집중분포한다. 유물산포지는 `썩은섬'에서 월평동 `동물개'에 이르는 10만여평의 면적으로 자랑하며 산남일대에서 가장 넓은 유물산포 범위를 갖고 있다.
물 좋기로 소문난 강정 하구는 매년 여름철이면 몸속까지 차갑게 느껴지는 계곡 물을 벗삼아 은어축제가 열린다. 축제가 열리는 조금 상류에 강정 취수장이 있다. 강정취수장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지난 1971년 시설용량 5천톤 규모로 1차 물막이 공사가 시작된 이래, 1981년부터 현재 상태인 2차 공사로 이어졌다. 강정천의 1일 취수량은 2만7천톤. 1993년 보조수원으로 개발된 악근천의 물을 추가로 공급받아 이 일대에서만 하루 3만5천톤이 취수되고 있다. 9만명에 가까운 서귀포 시민중 70%에 이르는 5만7천여명이 강정물을 식수로 먹어 왔으니 서귀포의 생명수나 다름없다.
취수장 상류에는 `냇길이소'이가 위치해 있다. 강정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지난날 일강정(一江汀)의 꿈을 키워내고 다시 미래로의 제일강정(第一江汀)의 꿈을 빚어내는 곳이 바로 강정천 냇길이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냇길이소는 주위의 경관이 수려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특히 소를 애워싼 주위의 절벽이 일품이다. 주민들은 폭포와 암벽, 은어, 깨끗한 물 등 네가지가 길상(吉相)이라 하여 `넷길이소'로 불려졌다고도 전한다.
우회도로 제2도순교에서 하류 2백m 지경은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도순천은 하류에서는 강정천이라 불리지만 이곳 도순지역의 지명에서 하천지명이 고시됐다. 제2도순교 방면이 영실로 향하는 주류이고 동북쪽으로 이어진 하천은 녹나무자생지로 이어진다. 도순천(강정천)의 분수령이 된 곳이다. 도순주민들은 이 합류지점을 `거린내'라 부른다.
녹나무자생지는 제3도순교 주변에 위치해 있다. 이곳 녹나무자생지 군락은 천연기념물 제16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서귀포시 하원은 도순천 상류에 있는 마을이다. 이 하천의 발원지인 영실의 행정구역이 바로 하원이다. 영실은 하원동 산1번지이다.
하원에는 귀중한 역사․문화적 유물들이 많아 관심을 끈다. 제주선인들은 샘이 흐르거나 물이 있는 곳에 터전을 정하고 그곳에서 역사와 문화를 빚어냈다.
서귀포 우회도로 탐라대학교로 통하는 세거리 서측에 위치한 법화사와 강정천 두 주류사이에 있는 왕자묘는 하원마을뿐 아니라 제주의 중요한 역사 문화유적으로 손꼽힌다.
법화사(法華寺)는 제주시 외도동 수정사(水精寺), 삼양동 원당사(元堂寺)와 더불어 제주지방의 대표적 사찰로 알려져 있다. 최근 발굴조사에 위해 고려 원종 10년(1269)~충렬왕 5년(1279)까지 중창된 기록이 있는 명문기와가 출토돼 이 시기에 크게 번창했던 사실이 확인됐다.
그러나 이후 교세가 점점 약화되기 시작, 16~17세기에는 사찰의 명맥만이 유지되다가 18세기에는 터만 남게 되었다. 이때부터 찬란했던 불교문화는 사라지고 말았다.
1914년 도월(道月)선사가 폐사된 법화사터에 포교소를 설치했으나 한국전쟁 당시 모슬포육군훈련소 제3숙영지로 사용되면서 절터는 더욱 훼손되었고 1960년쯤 숙영지로 사용됐던 일대의 초가를 헐어내고 정지 작업중 직경 80~1백20㎝의 주초석(株礎石)과 거대한 지대석들이 발견돼 사찰의 규모를 짐작케 해주었다.
법화사지 발굴조사는 1982년부터 모두 8차에 걸쳐 실시됐으며 1987년 지금의 대웅전이 복원됐고 구품연지(九品蓮池)의 존재가 확인돼 1천6백여평 규모로 복원됐다.
법화사에서 동북쪽으로 약 3㎞쯤 위치에 `하원동 분묘군'이 있다. 일명 `왕자묘'라 불리는 분묘로, 영실에서 발원한 강정천 두 주류의 사이 해발 2백m 지경 나지막한 능선상에 위치해 있다. 묘가 위치한 곳은 이 곳 지명으로 `웃간장'이라 하며 마을 주민들에 의해 `왕자골'이라 불린다. `웃간장'의 `간장(間場)'은 대정현 관아의 8소장(八小場) 간에 위치해 있음을 지칭하는 말이다.
분묘 3기가 남북으로 연결된 이 묘들은 탐라국 지배세력이었던 왕자의 묘인지, 아니면 원(元)의 양왕자(梁王子)와 관련된 분묘인지를 놓고 아직도 전문가들 사이에 논란이 여전한 실정이다. 왕자묘는 일제때에 심한 도굴로 인해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된 이후 현재 문화재당국에 의해 복원된 상태다.
도순천 변 법정악 일대에는 삼림욕을 할 수 있는 휴양림이 조성돼 있다. 1995년 개장한 서귀포자연휴양림이다. 숲 자체가 휴양림이기도 하지만 삼림욕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각종 편익시설이 갖춰져 있어 찌든 도시민들을 반긴다. 우리나라 최남단 유전자보존림이라 할만한 영실 소나무림 등반로 옆 계곡은 산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여간 반갑지 않은 생명수이다. 이 하천은 영실계곡에서 시작됐다. 바로 도순천의 발원지다.
제주의 대표적인 비경을 간직한 영실은 종전까지 알려졌던 계곡의 공간이라기 보다는 도내 최대 규모의 분화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국내 화산지질학계의 권위자로, 당시 현장 답사에 참가했던 부산대 윤성효교수는 ꡒ영실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화구 중앙에 거대한 돔을 갖춘 분화구ꡓ라고 강조했다.
용암절벽이 파노라마 처럼 양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고 절벽 상단에는 갖가지 군상들이 호령하듯 버티고 서 있다. 바로 오백나한이다. 절벽 틈으로는 많은 양은 아니지만 용출수가 흘러나오고 있다. 수직 절벽에는 진녹색의 부처손이 다닥다닥 붙어 절벽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고 있다. 도순천은 결국 영실 병풍바위 일대 해발 1,600m 부근에서 발원해 남서류하다 강정하구로 이어지고 있다.
영실 서북쪽 불래악 남쪽 기슭에는 국성제를 지냈던 존자암이 있으며 영실 동쪽에서는 베일속에 감춰져 있던 `수행굴'의 존재가 확인됐다. 수행굴의 발견은 존자암과 더불어 제주 불교유적을 새롭게 조명하는 화두를 던졌다.
▶중문천
중문천은 현대 제주관광의 효시격인 중문관광단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하천이다. 제주에서 경관이 빼어나기로 소문난 3대 폭포(천지연폭포, 정방폭포, 천제연폭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계곡에 있는 천제연 3단 폭포이다. 제주도가 지정 고시한 공식 하천 지명은 중문천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지역민들에게는 `성천' `베릿내' `천제천' 등 여러가지 형태로 불리고 있다.
성천포구(星川浦口)는 중문동 베릿내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미역이 많이 생산되던 곳으로 태우와 고기잡이배들을 정박시키고 폭풍 재난을 막는데 계곡을 끼고 있는 성천포구는 안성맞춤이었다. 반농반어의 생활을 하던 이곳은 어민들이 1970년대 말 중문관광단지가 조성되면서 뿔뿔이 흩어져 추억속의 마을이 되었다.
성천포구 사람들의 생업의 터전이었던 이곳엔 개발과 레저바람을 타고 마린파크와 요트장이 들어섰다. 베릿내어촌박물관은 천제연폭포의 계곡물이 바다와 만나는 포구에 별이 내리는 내(川)라는 뜻의 베릿내마을 옛 모습을 복원시켜 놓은 것이다. 성천포의 근간은 베릿내오름(성천봉)이다. 베릿내오름은 천제연폭포가 바다와 만나는 하구 부근에 분화한 기생화산체이다. 베릿내오름 앞쪽은 논농사를 짓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에 논농사가 가능했던 데는 대정군수 채구석이 있었다. 1907년부터 2년 동안 베릿내오름 남쪽에 5만여평의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짓고자, 일주도로변 1단 폭포에서부터 이곳까지 수로를 만들어 옥토를 만들었다. 현재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천제연 1단폭포 옆에 세워져 있다.
계곳 곳곳에서는 용출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천제연계곡에는 1단폭포와 웃소, 2단폭포와 알소, 3단폭포와 진소 및 가래소를 이루는 특수지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계곡 양변에는 상록수림이 잘 발달되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천제연 난대림지대는 1993년 천연기념물 제378호로 지정됐다. 천제연 계곡에는 도지정문화재 제14호인 담팔수나무가 자생하고 있고 녹나무, 산유자나무, 구실잣밤나무, 등의 난대식물이 군락으로 자생하고 있고 희귀종인 솔잎란이 분포하고 있어 학술적 보존가치가 매우 큰 난대림지대이다.
하지만 1단폭포 하단부의 병풍처럼 둘러싸인 주상절리가 교량과 같은 인공구조물에 의해 점차 무너져 내리고 있어 안타깝게 하고 있다. 실제로 1단폭포의 전면에 발달된 주상절리들은 1겹 내지는 2~3겹으로 하단부가 떨어져 나가 상부의 주상절리 기둥만이 폭포 전면에 매달려 있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천제교에서 제2천제교간 700m 지점은 하천폭이 넓고 용암류의 큰 바위들이 산재해 있다. 천제교에서 상류 150m 하천 서쪽에는 큰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는데 마치 서귀포 해안에 있는 외돌개를 연상시킨다. 이 일대는 우기때를 빼면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지만 1단폭포에서 2백m 올라간 곳에 `천지연 구명'이라는 샘이 있다. 천제연 인근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구명'은 여름철 천둥치면서 비가 많이 내리면 샘이 솟아나는데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수량이 풍부하고 수심이 적당하며 수영하기에 적합하여 중문마을 사람들은 이 곳에서 수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 물이 흘러내리면 웃소에 폭포를 이루어 천제연을 찾는 관광객에게 천제연 폭포의 이미지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고 한다.
천제연 1단폭포에서 상류쪽 400~500m쯤 지점에는 `올리소'라고 불리는 매우 풍취가 빼어난 곳이 자리잡고 있다. 냇바닥이 매끄럽고 많은 양의 물이 고여 있어 오리떼가 이 곳 물에서 놀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바로 위에는 선인들이 원시생활을 했던 다람쥐궤가 있다. 냇가의 동쪽 절벽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작은 굴로 다람쥐가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해서 지명이 유래됐다. 현재는 이곳에 중문마을 본향신을 모신 큰 당이 있다. 궤안에 제단이 놓여져 있다.
1단폭포 상류 북쪽 약 1,130m 거리에 있는 중산간도로 교량이 동․서를 잇는 중문교이다. 중문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웃냇도라고 불렀다. 중문교를 지나면 하천 서쪽에 그릇의 덮개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다. 그래서 `두께물'이라고 불리우고 있으며 또한 물고기가 입을 벌린 머리모습을 해서 `두어(頭魚)물'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비교적 출입이 쉬운 곳으로 냇바닥이 암반으로 넓게 홈을 이루어 많은 물이 고여 예로부터 부근에 살았던 주민들은 이 물을 식수로 이용하였다.
`두께물'에서 100m 북쪽에서 중문천은 분수령을 이루고 있다. 상류에서 두 줄기로 남류하던 하천이 이곳에서 하나로 모아져 천제연폭포와 성천포구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중문마을에서 북서쪽으로 2㎞ 정도 거리에 있다. 주민들은 이 부근에서 동녘내와 서녘내가 서로 갈려지기 때문에 `가른내'라 부른다. 주변에는 구실잣밤나무가 울창하다.
▶금성천
북제주군 관내 대부분의 하천은 곡폭이 좁고 곡의 발달이 미약하여 하천의 길이가 짧은게 특성이다. 일명 정자천(亭子川, 綎자천, 정지내, 정짓내)이라고도 불리는 금성천도 곡폭의 그다지 넓지 않고 후우가 내릴 때는 일사천리의 격류가 되나 맑게 개인 수일 후에는 잡초가 무성한 건천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북군지역에서는 드물게 하천 길이가 15㎞이상 되는 비교적 긴 하천이다.
금성천은 성곽터를 비롯한 많은 역사 유적을 간직하고 있는 애월 금성리와 봉성리, 어음리, 한림 귀덕리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하천으로 주민들에게는 많은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성천의 지형도상 발원지는 해발 7백10m. 그러나 직접 답사해보면 이보다 훨씬 높은 한대오름 해발 9백m 지경에서 발원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곡두(谷頭) 부근의 실개천과 같은 수많은 지류가 모아져 본격적인 계곡의 형태를 띄기 시작하며 고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다른 곳에서 발원한 수많은 소하천들이 하류로 이어지면서 계속 합류하는, 복잡한 하계밀도를 보인다.
이 가운데 가장 높은 지점에서 발원한 하천은 검은들먹오름과 다래오름 일대에서 계곡 방향의 분수령이 되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괴오름과 폭낭오름 주변에서 발원한 또 다른 주류가 새별오름(샛별오름)과 이달오름을 거쳐 비로소 애월읍 어음2리 해발 220m지경에서 한대오름 줄기와 합류한다. 이어 봉성리 구몰동 선운정사 하류에 이르러 어음천과 만나 해안까지 이어지고 있다. 금성천은 이렇듯 상류에서 수없이 많은 줄기들이 잇따라 합류, 복잡한 하계밀도를 보이다가 하류에 이르러 대천을 이룬다.
새별오름(曉星岳, 眞星岳)은 금성천 유로(流路)의 분수령이 되고 있다. 서북 방향으로 이어지던 금성천의 유로가 새별오름을 만나면서 급격하게 북쪽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금성천의 유로와 지형 지질도 주변 오름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고 있다. 하천의 발원이 오름 일대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류 복잡한 하계밀도가 주변 오름군(群)에서 비롯되고 있다. 하상 상당 면적이 상류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오름에서 비롯된 흑색화산회토로 덮여 있는데서도 이를 입증한다.
금성천은 하류에 이르러 북제주군 애월읍과 한림읍을 경계짓고 있지만 애월읍 주민들과 더욱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역 마을이 하류 금성리를 비롯해 봉성리(구몰동, 화전마을 포함), 어음1․2리등 애월읍에 집중돼 있음이 이를 말해준다.
주민들은 하천에서 샘솟는 용출수와 빗물을 저장, 귀중한 식수와 농업용수를 공급받았으며 목축의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하천수는 때로는 범람원이 돼, 엄청난 재앙을 부르기도 했지만 주민들은 곳곳에 당신(堂神)들을 모셔 자연에 순응하며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했다. 금성천 유역 곳곳은 아직도 삶의 애환과 역사흔적들이 배어난다. 4․3의 상흔과 화전마을 자취, 목호의 제주지배를 종식했던 새별오름 전적지 등은 그 사례들이다.
4․3 당시 쌓았던 城의 잔해는 물론 상류에서는 피난생활의 흔적으로 보이는 움막터들도 여러곳에서 확인된다. 봉성리(어도리), 화전마을, 발이오름 등은 4․3의 아픈 기억들이 서려 있는 곳이다.
금성천 상류에서 확인되는 화전경작은 4․3의 발발로 중산간 마을이 소개되고 1968년 화전정리법이 제정돼 법으로 금지되면서 역사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화전민들의 주거지가 남아 있으며 그들의 활동무대였던 드넓은 초지와 공초왓이 선인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금성천 중류에 위치한 애월읍 봉성리는 재산무장대와 토벌대 양측 모두에게 피해를 입었던 대표적인 마을이다. 1949년 12월 17일(음) 새벽 재산무장대의 습격으로 마을이 불타고 주민 30여명이 희생됐다. 아침에는 해안에서 올라온 군인들이, 산사람들과 내통했다며 마을주민 수명을 끌고가 처형했다. 이러한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1백50여명이 희생되었다. 주민들은 마을 이름 때문에 궂은 일이 많이 생긴다 하여 어도리(於道里)였던 마을 이름을 4․3 이후 봉성리(鳳城里)로 바꾸어 버렸다.
봉성리 신명동은 4․3으로 새롭게 생겨난 마을이다. 1948년 11월, 군경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대부분이 불에 태워졌다. 봉성리 주변 자연부락인 자이동, 월각동, 화전동 등 6~7개의 자연부락도 이때 없어졌다. 봉성리 본동으로 소개되었던 자연부락 사람들은 잃어버린 마을 대신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마을이 신명동인 셈이다.
금성천 본류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어음1리 하천변에 4․3 당시 쌓았던 성의 잔해가 있다. 발이오름과 금성천 사이의 참나무숲에 있었던 자연부락 `북케초남밭' 역시 4․3으로 사라져 버린 마을이다. 지난 93년에는 발이오름 동굴에서 피난생활을 하다 토벌작전에 의해 사망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되어 충격을 주기도 했다.
한라산 밀림으로 접어드는 금성천 상류 주변에는 4․3 당시 피난생활의 흔적으로 보이는 움막터들도 여러곳 눈에 띤다. 피난민들은 혹한의 한라산에서 추위와 토벌대의 눈을 피해 땅을 파고 움막을 지어 원시인 같은 은거생활을 해야 했다. 피난민들의 은거지는 식수를 쉽게 구할 수 있는 하천을 가까이 할 수 밖에 없었다. 금성천 상류에 해당하는 검은들먹오름과 한대오름 서북측 언저리에는 한림읍과 애월읍 주민들이 집단 피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옹포천
옹포천은 북제주군 한림읍 중심을 가로지른다. 북제주군 대부분 지역 하천이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인데 반해 옹포천은 북군 서부지역 최대의 용천수를 자랑하는 하천이다. 건남내(乾南川), 월계천(月溪川)라고도 불린다. 동쪽으로 한림항, 서북쪽엔 천혜의 절경과 황금어장인 비양도가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곳에 옹포천 하구가 바다와 맞닿아 있다. 시원하게 뚫려 있을 하구는 바다를 가로질러 해안도로를 내는 바람에 막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옹포리의 옛 이름은 `독개'. 너럭바위로 이루어진 개라는 뜻이라고 한다. 한림읍지(1999)는 독개의 유래에 대해 `후미져 들어간 독처럼 펑퍼짐한 뱃자리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적고 있다. 강순석박사는 ꡒ새끼줄 구조가 잘 발달된 현무암질 용암류가 옹포 하구에 발달돼 있기 때문ꡓ이라고 한다. 이런 독특한 지질구조는 해안도로 개설로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바로 옆에는 소파우코지'(소파위코지)라는 곳도 있다. 옹포마을의 중심 뱃자리인 `독개'의 북풍막이 구실을 하는 곳으로 저절로 둥그렇게 생긴 물웅덩이다. 조선 총독부 시절에는 전복을 살려두는 자리였다고 한다. 일종의 전복양식을 했었던 곳이다.
옹포천은 연중 용출하는 풍부한 수량 때문에 최적의 공장 입지조건을 갖췄다. 일제 강점기에는 군수품 통조림 공장과 양조장, 전분공장, 직물공장 등이 입지하여 제주도 서부지역의 최대 공업지대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일제의 잔재는 하구 주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낡은 건물만이 당시의 흔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지역 소주업체인 한라산 제조공장이 옹포천 하구에 위치,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해안도로에서 2백m쯤 상류 옹포교(橋) 인근까지 해수와 용출수가 교차한다. 박한철 전 옹포리장은 ꡒ내가 젊을 때만해도 옹포교 아래 수심이 용출수로 인해 1m 이상을 유지했었으나 지금은 발목에도 모자란다ꡓ고 아쉬워했다. 그는 또 이곳에서 은어와 장어잡이 했던 기억도 떠올렸다. 옹포천 하구는 시간이 갈수록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옹포천 변에는 한림정수장이 위치해 있다. 하구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이다. 동명리 마을에 있는 이 정수장은 한림과 애월, 한경 등 북군 서부지역의 젖줄이다. 시설용량이 1일 취수량 2만6천여톤, 정수량은 2만4천여톤에 달한다. 급수인구도 1만8백여가구 3만2천여명에 이른다.
주민들에 따르면 동명리 정수장 일대 `마구물'과 `조물' 두 갈래의 용천수를 가리켜 쌍계수(雙溪水)로 불렸는데 이 물이 옹포천으로 합류했었다고 한다. 수량이 매우 풍부한데다 물이 워낙 맑고 차가워 발을 담그기 조차 어려웠다고 하니 가히 짐작할만 하다. 지금은 정수장이 들어서면서 옛 모습을 알아 볼 수 없다. 옹포천은 쌍계수 부근 일대에 용출하는 수원지로 항상 풍부한 수량을 이루어 하구에는 옛부터 제조업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옹포천 하구에서부터 명월대에 이르기까지 하천 대부분 구간이 `하천정비'로 원형을 잃어버렸다. 옹벽이 쌓아지고 바닥은 준설돼 하천을 무색케하고 있다.
동명리는 한림읍 중앙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한림읍의 상수원이 자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중산간 농촌마을. 이 마을은 감귤과 양파가 중요한 소득원을 이루고 있다. 동명리는 고대마을터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림리에서 금악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약 1㎞ 정도 올라간 지점의 도로 양쪽 경작지 일대에서는 유적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동명리 유적은 지난 1986년과 1998년 보고된 초기 철기시대(기원전 1백년~기원 전후한 시기)의 유물산포지로 알려져 있다. 당시 발견된 유물로는 무문토기편과 방추자, 어망추의 토제유물과 마제석부, 석착 등의 석제유물이 있다.
동명리에는 월계 진좌수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회자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백20여년전에 태어난 명의로, 의술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신의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이 마을 원로인 양만생옹은 현재 한림정수장 옹포천 바로 서쪽에 그가 기거했던 곳이 남아 있다고 전했으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진좌수에 대한 조명이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옹포천 상류에는 제주도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명월대와 팽나무군락지가 있다. 이 하천의 명성을 더욱 빛내주는 명소들이다.
제주도기념물 7호인 명월대(明月臺)는 조선조말 이 지방 유림들이나 시인 묵객들이 어울려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예전 반촌(班村)인 이 마을은 맑고 고운 시냇물과 더불어 명월대가 한결 운치를 더해주는 곳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물이 거의 말라 아쉬움을 주고 있다. 대(臺)는 마을을 끼고 있는 명월천 하상 중앙에 팔각형의 석축을 3단으로 쌓고 그 위에 원형의 반석을 만들었다. 명월대 바로 아래에는 석교가 있는데 지난 85년 태풍 `키트'로 유실돼 복원됐다.
명월대는 하천 양쪽에 길게 늘어진 팽나무군락과 어우러져 더욱 일품이다. 명월 팽나무군락지에는 수백년생 팽나무 60여 그루와 푸조나무, 산유자나무, 호랑가시나무 등 노거수가 밀집해 있어 웅장한 풍치를 자랑하고 있다. 팽나무는 제주도내 오랜 마을에는 정자목(亭子木)으로 남아 있는 것이지만 명월의 팽나무는 집단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어 학술적 가치도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명월대와 팽나무 군락지의 수려한 경관은 옹포천의 대대적인 정비공사로 그 명성이 바래지고 있다. 옹포천은 팽나무군락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구간을 정비, 하천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당국은 하천정비사업을 통해 주변 농경지와 가옥침수를 예방하고 재해위험지구의 민원을 해소하려는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대대로 이어져온 하천이 송두리째 바껴버린 모습을 후세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하천을 자원으로 인식하지 못한 선대들의 잘못을 호되게 질책하지는 않을까.
▶천미천
천미천은 제주의 하천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도 긴 하천이다. 이 하천의 유역은 제주시 동남부지대와 북제주군 조천읍, 구좌읍을 거쳐 남제주군 표선면과 성산읍 경계에 걸쳐 있다. 하천 주변에는 제주 오름이 집중 분포해 있으며, 이들 오름은 천미천의 지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천미천은 본류 이외에도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작은 지류를 아우른다. 크고 작은 형태의 수많은 하천을 거느리다 보니 우기 때면 하천의 집수역할로 빗물이 일시에 몰려 범람이 잦기도 하다. 성읍민속마을과 신천, 신풍, 하천리는 그 대표적인 마을들이다.
1861년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대동여지도에는 제주지역 하천과 오름의 지맥들이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특히 천미천(盖老川)은 줄기가 가장 길고 복잡한 하천으로 묘사돼 있어 실제와 상당히 유사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 지도에는 천미천을 개로천(盖老川)라고 표기하고 있다. 지도에 따라서는 介路․介老川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천미천의 하구 마을인 하천리(下川里)가 천미촌(川尾村)으로 불리기도 했다.
천미천은 돌오름, 어후오름, 물장올 등 여러갈래에서 발원한다. 천미천 하류의 하천은 그 폭이 100여m에 달하지만 발원지는 불과 한두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실개천의 형태다. 천미천은 주류와 본류 이외에도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작은 수많은 지류를 아우르고 있다. 지형도상에서의 천미천은 손바닥 손금 모양, 혹은 나뭇가지 모양을 닮았다. 이른바 수지형(樹枝形)하천으로 분류된다.
나무가지 모양의 하천인 천미천은 큰 물줄기를 이루는 본류로 이어지기까지 60여개의 하천을 합류한다. 이들 크고 작은 형태의 지류들이 본류로 모아져 거대 하천이 형성된다. 천미천을 하류(해안~성읍2리입구)와 중류(성읍2리~교래4거리 돔배오름 일대), 상류(돔배오름~발원지)로 분류할 때 중류지역에서 하계망이 매우 복잡하다. 이 지역에서만 하천이 50개 가까지 생성, 천미천 본류로 합쳐진다. 특히 산굼부리 주변 제동목장 일대와 성읍2리 마을 부근이 가장 복잡한 하계밀도를 보인다. 이에반해 성읍2리 마을에서 해안 저지대를 잇은 하천 본류지역에서는 하계밀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천미천은 하천변 오름의 형성과 그 화산활동에 직․간접으로 큰 영향을 받는다. 오름을 빼놓고는 천미천을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천미천에 영향을 준 오름은 대략 상류 17개, 중류 23개, 하류 4개 등 40여개에 달한다. 이 중에서 돌오름, 어후오름, 불칸디오름, 물장올, 개오리오름, 돔배오름, 물찻오름, 말찻오름이 천미천 상류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오름들이다. 중류는 산굼부리, 부대악, 부소악, 비치미오름, 개오름, 성불오름, 소록산, 대록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천(大川)을 이루는 본류에 해당하는 하류는 영주산과 남산봉, 달산봉이 하천지형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이들 오름들은 하천의 생성원인이 됐거나 하천의 유로를 바꿔 놓았다. 특히 오름에서 분출한 용암들은 하천을 겹겹이 피복시키는 역할을 했다. 천미천은 일반적으로 하천 형성시기가 늦어 아직도 하천화가 진행되는 하천으로 분류된다. 이런 징후는 곳곳에서 목격되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측방침식과 하천의 범람이다.
천미천은 실개천이 모여 하천과 계곡을 잉태시켰고 수십㎞를 내달려 마침내 바다와 만난다. 천미천은 한라산 돌오름에서 발원해 제주시 봉개동과 북제주군 조천읍, 구좌읍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우회, 남제주군 표선면과 성산읍을 경계로 남류(南流)한다. 도내 4개 시․군 가운데 서귀포시를 제외한 3개 시․군을 끼고 형성된 것이다.
마을과 하천간 거리상 다소 차이는 있지만 제주시 봉개동을 비롯해 조천읍 교래리, 구좌읍 대천동, 표선면 성읍1․2리, 하천리, 성산읍 신풍리, 신천리 등 8개 마을이 천미천 유역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 마을은 대부분 하천을 경계로 양쪽에 위치하고 있어 설촌배경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이 중에서도 조천읍 교래리와 표선면 성읍․하천리, 성산읍 신풍․신천리가 대표적이다.
이곳 마을 주민들은 천미천과 더불어 희로애락을 같이 해 왔다. 오우때면 도내 최대 범람지역이어서 가옥은 물론 애써 가꾼 농경지와 작물들이 한꺼번에 빗물에 잠기거나 쓸려 내려가는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도 주민들은 오늘날까지 수백년 세월을 인내하며 마을의 명맥을 유지하고 발전시켜오고 있다.
천미천 주변 곳곳은 도내 여느 지역 못지않게 많은 역사․문화유산과 자원을 간직하고 있으며 제주지역 동서남북을 잇는 교통요충지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재론할 필요도 없이 도내 최대 역사․문화․관광지인 성읍민속마을이 천미천을 끼고 있다. 목장지대인 성읍2리를 거슬러 대천동은 동부관광도로와 비자림 및 산굼부리를 잇는 교통 요충지이다. 산굼부리를 지나면 설촌유래가 7백여년이 되며 한때 중산간 최대마을로 그 세가 컸던 교래가 차지하고 있다. 4․3으로 말미암아 폐허가 되고 주민들이 조천, 함덕으로 이주해야 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미니월드와 돌문화공원이 들어서는 등 역사문화․생태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서중천
서중천은 감귤의 고장을 따라 흐르는 제주 동남부 하천의 주요 하천중 하나다. 동남부권에서도 주로 남제주군 남원읍 지역을 관통한다. 읍소재지인 남원리와 태흥리, 의귀리, 한남리가 서중천 하류 주변 마을들이다.
서중천은 한남리에서는 한남천, 의귀리에서는 의귀천으로도 불린다. 한라일보 탐사팀이 이 구간을 탐사할 때에는 역사적인 한일월드컵이 열렸다.
서중천은 제주도 지정 2급 하천이다. 국립공원 외곽 하천관리구역은 남제주군 남원읍 한남리 산2-1번지에서 남원읍 태흥리와 남원리로 해안으로 이어지는 총연장 12.01㎞이다. 그러나 이 시발점이 곧 서중천 발원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자치단체가 관리하고 있는 구간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탐사결과, 서중천은 한라산 해발 1,280m 일대 흙붉은오름에서 발원하고 있다. 흙붉은오름은 제주시 동부 화북과 거로마을을 관통하는 화북천도 발원시키고 있는 오름이다. 서중천이 한라산을 중심으로 북쪽과 동남쪽을 연결시키는 하천을 발원시킨 것이다.
서중천 발원지는 한 곳에 한정돼 있지 않다. 여러 갈래에서 발원한 실핏줄 같은 줄기가 모아져 비로소 본류를 형성하고 있다. 발원지에는 샘물이 용출하고 있다. 이곳은 치성터로도 알려져 있다. 화구 깊숙이에서 솟아나온 샘물을 따라 하천이 발원하고 있다. 선인들은 이 곳 샘물로 목욕재계하고 치성을 드리면 아이를 얻게 된다고 믿어왔다.
흙붉은오름서 발원한 서중천은 한라산 성판악 등산로를 따라 동남방향의 유로를 보인다. 물오름 앞 성판악휴게소 인근에서 시작된 여러 작은 주류들이 본류에 합하고 여기에 성판악에서 시작된 주류가 다시 모아지고 있다.
숲터널 인근 동수교를 지나 해발 4백20m 부근에서 서중천은 성판악 인근에서 뻗어나온 주류와 만나 가파르게 남류하다가 남원읍 한남리와 의귀리 경계 지점인 해발 1백m 상류에서는 다시 태흥과 남원해안으로 두갈래 갈린다. 특히 서중천 5․16도로변 해발 700~800m일대에서 수많은 실개천이 얽혀 복잡한 하계망을 띠고 있다.
서중천을 얘기할때 의귀리의 말문화를 빼놓을 수 없다. 탐사팀은 서중천을 탐사하면서 제주의 마문화를 새삼 되새기는 기회를 얻었다. 서중천변 의귀리는 헌마공신 김만일의 족적이 살아숨쉬는 곳이다. 제주의 역사는 마정(馬政)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적 조건이 말 기르기에 적합해 원(元)이 몽고마를 전래해 섬을 목장화한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제주는 국내 최대의 말 공급지로서 기능을 다하였다.
영조임금이 제주도를 일컬어 `국마의 부고(府庫)'라고 일컬었으며, 제주목사 이형상은 ꡒ섬(제주도)에 일은 마정보다 큰 것이 없다ꡓ고 했을 정도다. 제주에서 말공급은 조선 태조 3년에 1백필을 받친 것을 시작으로 태종 10년에는 6백필을 받친 것으로 태종실록이 전하고 있다. 특히 제주말과 관련한 헌마공신 김만일(1550~1632)의 족적은 뚜렷하다. 임진왜란으로 중앙정부가 전마 부족에 시달리던 중 김만일은 정부 요청으로 여러차례 말을 진상했다. 선조때 정의현 의귀리 출신의 김만일은 사목장을 운영했던 사람으로 선조 33년과 광해군 12년에 전투마 5백필과 3백필을 각각 바침으로써 헌마공신의 호와 오위도총부 부총관직(정2품)을 제수 되었다. 이 같은 공로로 감목관에 임명되고 그 후손이 이를 대대로 세습하는 등 제주목장사에 이름을 날렸다. 남원읍 의귀리 서중천변에 위치한 `반디기밭' 일대는 지금도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제주마문화가 이처럼 제주역사에 핵심영역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으나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역사문화자원화하는 노력은 철저히 외면되고 있는게 오늘의 현실이다. 충분한 역사적 사료와 제주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들의 행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장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김만일가의 무덤에 있는 동자석이 도굴꾼에 의해 훼손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빚어지기까지 했다. 동국대 남도영교수는 ꡒ제주의 소중한 마문화 유산은 시급히 발굴, 복원, 보호되어 후손에게 참되게 전승되어야 한다ꡓ면서 이를 관광자원화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정비'라는 이름아래 매년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고 있는 하천사업의 문제는 서중천 탐사과정에서도 재연됐다. 하천정비가 재해예방에 치중한 나머지 하천보호측면은 무시되고 있다.
자치단체들은 하천정비를 하면서 `친환경적'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있지만 원형을 깨부수는 정비가 과연 친환경적인가라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환경부 등이 하천정비의 문제점을 거론하고 있지만 바로 이 시각에도 우리시대 우리 손에 의해 자연유산인 하천은 야금야금 잠식되고 제모습을 잃고 있다.
▶신례천
신례천은 남제주군 남원읍 하례리와 신례리 경계를 가로지른다. 서귀포 효돈천과 더불어 돈내코계곡과 더불어 전 구간이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18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효돈천은 하구를 기준으로 신례천 바로 서쪽에 위치한 하천이다.
신례천 하구 일대는 `공천포'(公泉浦, 貢泉浦)로 알려진 신례2리 주민들의 삶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는 곳이다. 공천포는 마을 지명에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콸콸 솟는 샘이 많아 남원읍과 산남지역은 물론 제주섬 제일이라고 할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검은 모래 사장과 그 한가운데에서 사철 솟는 `영등물' 신례천 하구 삼각주 인근에 있는 `산이물', 롯데공장 부지가 있는 `물난밭' 등 마을 한복판과 바닷가 등 마을 어디에서나 용천수가 솟았다.
하구의 폭이 무려 100m나 된다. 바로 앞쪽 해상에는 지귀도가 손에 잡힐 듯하다. 이 곳 주민들은 넓고 평평하게 바다쪽으로 뻗쳐 있는 암반지대를 가리켜 `밥주리 빌레'라고 불렀다. 확실치는 않지만 밥주리새(참새)들이 떼를 지어 이곳에 자주 몰려왔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바다와 하천이 만나는 주위 일대를 내가 끝나는 곳이라 하여 `내깍'이라고 부른다.
하구와 바로 맞닿은 곳에 대규모 삼각주가 형성돼 있어 눈길을 끈다. 이 곳 주민들이 속칭 `명살'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남북 200m, 동서 30여m, 면적 3천여평이나 되는 이 삼각주에는 주택은 물론 과수원과 체육시설까지 들어서 있어 그 안에 들어가면 하천내에 있는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다.
삼각주 서쪽 콘크리트 포장다리 아래는 `산이물'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물이 워낙 깨끗하고 차가워 식수와 여름철에 몸을 식히려는 사람들로 붐볐던 곳이다. 또 이물에 장어와 많은 은어가 서식했으나 지금은 은어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장어는 멸종되었다.
공천포의 풍부한 용천수가 점점 그 자취를 잃어가고 있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잇따른 지하수 개발로 용천수의 수위가 줄어 어떤 곳은 아예 물이 솟지 않고 흘러도 그 양이 급격히 줄었다. 어떤 곳은 오염 피해를 받기도 했다. 하천의 용천수도 아예 모래와 자갈로 뒤덮였고 여름철 큰 내를 칠 때를 빼곤 이젠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돼버렸다. 공천포 주민들과 이 마을을 아끼는 많은 사람들은 그 때 그 시절의 향수를 그리워하고 있다.
지형도 상의 신례천 발원지는 모두 5곳이다. 그 가운데 해발 1750m 진달래밭 일대가 가장 고지대 발원지다. 또 두 곳 발원지가 사라오름과 성널오름 일대에 위치, 오름이 하천 발원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이 신례천에서도 나타난다, 탐사팀은 5곳의 발원지 가운데 진달래밭과 사라오름, 성널오름 일대 등 모두 4곳을 직접 확인했다. 이 외에도 수많은 가지하천들이 본류로 연결되고 있다.
발원지를 떠난 신례천은 보리악과 논고악, 대한농장에서 분수령을 이룬다. 보리악은 진달래밭과 사라오름 일대 등 4곳에서 발원한 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이다. 보리악 일대의 하상은 그래서 독특한 경관과 지질 특성을 보여준다. 성널오름 일대에서 시작된 또 하나의 줄기는 논고악에서 유로를 틀고 있다.
두 개의 줄기로 형태를 달리한 신례천은 다시 5․16도로를 지나 신례리 대한농장 하류에서 비로소 하나로 합쳐져 공천포 하구로 이어진다. 신례천이 신례리와 하례리 주민들 사이에 효돈천 다음 가는 대천으로 불리는 것도 바로 이런 하계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례천 중류에는 수악계곡 인근에서 4․3 당시 토벌 나섰던 경찰들의 주둔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주민들을 동원해 돌담으로 성을 쌓은 이 주둔소는 3천평 면적에 초소 등을 갖춰 4․3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제주시내를 관통하는 한천이 탐라계곡으로 불리는 것처럼 신례천을 얘기할 때 수악계곡을 빼놓을 수 없다. 오름의 하나인 수악의 이름을 빌려 명명된 이 계곡은 수악 상류 5․16도로를 거슬러 보리악 일대를 아우른다. 수악계곡에 이르면 계곡은 더욱 깊어지고 보리악 근처는 그 높이가 1백m가 넘는다. 심곡이 아닐 수 없다.
백두산 입구의 천연림인 `지하삼림(地下森林)' 지대에 있는 좁은 협곡을 수악계곡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보리악을 직접 관통해 수악계곡을 형성하면서 만들어진 협곡이다. 제주도내 하천 유로상에서 기생화산체인 오름을 직접 관통해 형성된 하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다. 이 협곡지대는 하천 폭이 불과 1m 남짓에 불과하다. 강력한 유수의 힘에 의해 형성된 이 협곡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넓어지고 깊어진다. 여전히 하천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강순석 박사는 ꡒ이 지역의 하천에 형성된 협곡지대는 일단 송이층을 뚫고 형성된 하천이므로 좁은 협곡을 만드는 것이 당연하다ꡓ고 말했다.
신례천 발원지 중 한 곳은 산정화구호로 유명한 사라악이다. 제주도의 오름들 중에는 산 정상부의 분화구가 물로 채워진 오름들이 10여개 분포하는데 그 중에서도 사라악 산정화구호는 단연 압권이다.
성널오름(성판악) 또한 신례천 발원지 중 한 곳이다. 쌍둥이 화산체인 이 오름은 이 일대에 산재하는 기생화산 중의 맹주라 할만하다. 산 중턱에 암벽이 널 모양으로 둘려 있는 것이 마치 성벽처럼 보인다해서 명명됐다.
성널오름 상류는 넓은 소나무림을 형성하고 있어 독특한 경관을 이룬다. 그보다 상부지역은 구상나무림이다. 이 일대의 구상나무림은 세계에서는 유일한 순림지대로 우리가 영원히 아끼고 보존해야할 자산이다.
▶창고천
창고천은 하류에 남군과 서귀포시를 경계짓고 상류에 이르러서는 북군과도 접해 있다.
남군에는 하류의 화순, 대평을 비롯해 감산, 창천, 상창, 상천, 광평 등 7개 마을이 접해 있으며 북군 애월읍 봉성리 화전마을도 창고천 유역 마을로 포함할 수 있다. 서귀포시지역은 상예동이 창고천에 바로 접해 있다. 창고천 유역에는 남군과 북군, 서귀포시 지역 9개 마을이 분포해 있다.
창고천은 유역 주민들에게 귀중한 식수와 농업용수를 제공했으며 간직하고 싶은 갖가지 추억이 깃든 곳이다. 때로는 재해로 물이 넘쳐 흘러 귀중한 생명과 삶의 터전을 앗아가기도 했던 쓰라린 공간이기도 했다. 85년 당시 태풍 `키트'가 논밭을 유실시키고 목숨을 앗아간 사실은 아직도 주민들의 가슴을 쓸어 내린다.
창고천은 역사․문화유적과 많은 전설이 깃든 공간이다. 하류 안덕계곡은 풍부한 생태자원과 함께 계곡의 물을 이용하기 위해 제주 선인들이 대역사를 펼쳤던 현장이라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있지만 20여년전만 해도 이 일대 6만여평의 계단식 능선은 제주에서는 드물게 쌀밥을 먹게했던 논농사가 이뤄졌던 곳이다.
화순지경 도채비빌레 위에 세워진 김광종의 개척기념비는 이곳의 논농사가 어떻게 이뤄지게 됐으며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거대한 도수로 공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안덕계곡 상류 감산 지역 용바위 앞에는 하천의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매우 원시적인 형태의 도수로 흔적도 남아 있다. 감산 지경 속칭 `닥밭당' 상류에는 한천의 방선문과 용연 이외의 하천 변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마애명문이 있다. 조선 영조때 사간원 정언이었던 임관주의 오언절구가 음각되어 있다.
하류 곳곳에는 바위그늘 집자리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데 이곳에서 선인들의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좌혜경 박사는 창고내를 ꡒ문화의 보고ꡓ라고 평가한다. 군산, 병악, 반석(유반석, 무반석)과 같은 자연지형 전설을 비롯해 대(大)수로 개발에 얽힌 막산이 전설, 상류 지역 주민들이 촌락을 일구기 위해 고지대의 나무를 끊고 끌어내리면서 부르는 노래에 얽힌 이야기들은 창고내 선인들의 발자취라고 할 수 있다. 좌 박사는 ꡒ자연과의 조화 혹은 자연을 극복하고자 했던 지역민들의 염원을 표현한 것ꡓ이라고 가치를 부여했다.
창고천은 해발 9백80m서 발원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1100도로변 삼형제오름 일대에 드넓게 펼쳐진 고산습원이 창고천의 발원지이다. 창고천 발원지 주변에는 크게 3개소의 고산습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00고지 탐라각휴게소 일대, 삼형제오름 북측 일대, 그리고 한대오름 동측일대에 분포된 습지가 그것이다. 모두 고지대에 형성된 습지로서 그 중요성이 부각된다.
창고천의 유로와 지형․지질도 주변 오름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고 있다. 상류는 곡두(谷頭) 부근의 실개천과 같은 지류가 모아져 남류(南流)하다 돌오름 상류에서 방향을 서쪽으로 선회한다. 이어 봉성 화전마을 인근 빈네오름에서 방향이 다시 한번 꺾이면서 남류하고 돌오름에서 발원한 주류와 산록도로 위 광평마을에서 합류한다. 이처럼 상류의 하계밀도는 매우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다.
중류는 비교적 완만하게 광평, 상천, 상창마을을 통과하고 있으며 하류 안덕계곡에 이르러 급경사를 이룬다. 군산과 월라봉을 잇따라 만나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하구 `황개천'에 이르고 있다.
창고천 전 구간중 하구는 매우 특이한 지질구조를 보여준다. 대포 지삿개와 예래 `갯깍' 주상절리를 연상케하는 베개용암의 수축절리와 수중화산활동의 결과물인 대규모 퇴적층이 확연히 드러나 있다. 퇴적층은 인근 군산에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해 화산지질학적 가치를 높여주고 있으며 그 비경이 압권이다.
안덕계곡을 지나면 하상정비로 원지형이 훼손돼 아쉬움을 주고 있다. 완만하고 퇴적층으로 이루어진 하상은 빈네오름에서의 활발한 측방침식으로 다시 깊어진다.
창고천은 전 구간에 걸쳐 수자원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발원지와 하류의 수자원이 독특한 곳이다. 3만여평에 이르는 드넓은 고산습원에서 발원하는 특이한 지형인데다 하류는 수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유명한 안덕계곡이 이어져 있다.
창고천 하류의 풍부한 수자원은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공간을 제공했다. 연못에는 수백마리의 원앙이 관찰되고 한때 장어와 민물참게의 대표적 서식지로 이름을 날렸다.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안덕계곡에는 3백여종의 제주자생 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생활하수의 유입과 무분별한 개발로 천혜의 생태공간이 크게 위협받고 있는 사실이 드러난다. 참게 서식지는 생활하수와 내수면 어업이 허용되면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계곡 지반을 고려하지 않은 도로개발은 계곡 암반에 위협을 주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주민들의 계곡 살리기는 실낱같은 희망이다.
3. 나가며
한라산학술대탐사는 학술적 연구성과에 못지 않게 한라산의 가치를 내외에 알리는 데도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다. 1999년 여름 제주공항에서 개최된 `한라산학술대탐사 사진전‘을 비롯2000년에는 서울과 제주에서 `한라산- 백두산 사진전’이 개최됐다. 탐사단은 2000년 8월 12일부터 10박11일간 `백두산 비교 탐사‘에 나서 연변대학 학자들과 `한라-백두산 공동학술 세미나’를 국내학자들로서는 최초로 개최한 뒤 백두산 탐사결과를 한라일보에 10여 회 연재한바 있다.
특기할 것은 2000년 9월 취재팀장이 남북교차관광단에 참가 5박6일간 북한방문에 나서 백두산을 2차례 등정하는 등 북한의 산하를 둘러본 뒤 이를 10여 회에 걸쳐 연재, 관심을 끌었다. 특히 북한 방문 중 백두산연구소가 설립^운용되고 있음을 알고 그 해 10월 당시 제주도지사에게 `한라산연구소‘ 설립의 필요성을 건의, 한라산연구소를 설립(2001년 2월)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한라산연구소 설치는 국내에서는 단일 산만을 연구하기 위한 최초의 연구소로 남한최고봉이자 생태계의 보고인 한라산에 대한 제주도민의 애정과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며, 백두산과 더불어 민족의 상징에 걸 맞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탐사팀은 `서 `한라산-백두산 교차 탐사‘를 남북교류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제주도에 제안, 북측의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 탐사단은 백두산 비교탐사에 이어 2001년 11월에는 지금도 화산활동이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큐슈지방에 대한 4박5일간의 비교탐사에 나서기도 했다. 2003년 5월 제1부/ 하천과 계곡 탐사를 마친 한라산탐사는 그 해 9월부터 `제2부/ 한라대맥을 찾아서‘로 이어져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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