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들러보기

광성보 '14.3.2

다음마당 2014. 3. 5. 08:48

  

    광 성 보

 

       광성보는 조선 효종 9년(1658)에 설치되었고, 영조 21년(1745) 성을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고 안해루라 하였다. 고종 3년(1866) 프랑스의 극동함대와 공방전이 있었고(병인양요), 신미양요(1871년) 당시 조선군과 미군이 치열하게 백병전을 벌였던 최대 격전지다.

강화도 군사유적 중 가장 큰 곳으로 다리미 모양의 아담한 광성보돈대, 염하 쪽으로 용의 머리처럼 길게 뻗어나간 용두돈대,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한 손돌목 돈대가 있고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과 군사들을 기리기 위한 쌍충비와 51명의 신원미상의 군졸들을 7기의 묘에 합장한 신미순의총, 광성포대와 1977년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거 전적지를 보수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보수정화비(비문은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김충현이 썼다)가 건립되어 있다.

 

 

 

           광성돈대의 모습

 

 

 

 

 

                                     쌍충비와 51명의 신원미상의 군졸들을 7기의 묘에 합장한 신미순의총

 

            손돌목 돈대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으며,각각 9좌 ,4좌,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앙포대는 길이 80m,포좌의 크기 약 6m로 추정되고 있다.1875년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호를 개방함에 따라 파괴되었던 것을 2004년 발굴 조사를 실시 유적이 확인되어 복원정비를 하였다

 

 

 

 

 

 

 

 

 

                 

              좁은 강화해협에 용머리처럼 쑥 내밀고 있는 암반을 이용한 천연요새로써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다

 

 

 

 

 

 

 

 

            인조 5년 16247년 후금이 쳐들어왔을때 임금이 서둘러 강화도 피난길에 나섰는데 강화도로 가는 뱃길은 험했다. 급한 물살과 그에 따라 뒤집힐 것 같은 배는 임금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뱃사공인 손돌은 점점 더 험한 물살의 가운데로 배를 몰아가자 임금은 자신을 죽이기 위한 것으로 오해하여 손돌을 죽이라 하였고, 손돌은 죽기전에 '"물에 띄운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으로 배를 몰고 가면 안전하게 강화도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한뒤 죽었다.

결국 임금이 탄 배는 손돌이 죽은 뒤 손돌의 말대로 배를 몰아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하자 임금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의 시신을 잘 거두어 후하게 장사를 지냈다고 전해지는 용두돈대 앞의 소용돌이 치는 손돌목이다.